1945년 10월 8∼10일 북한에서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었고, 11월 19일에는 ‘5도행정국’이 출범하였다. ‘북조선5도행정국’은 10개의 국으로 조직되었으며, 10국은 공산당 4명, 민주당 2명, 무소속 4명으로 연립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북한지역에서는 광복과 동시에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지방 별로 광복에 대비한 자치조직이 설립되고 있었으나, 소련군에 의해 공산주의자가 우세한 형태가 되면서 각 도별로 통일된 하부행정기구가 재조직되었다. 1945년 8월 27일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하여 각 도에 인민위원회가, 그리고 9월 8일에는 소련군 주재로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북한은 1945년 9월 20일부로 주1의 지령에 따라 북한의 단독 공산정권 수립전략을 확정하고, 10월 8∼10일에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1월 19일 ‘5도행정국’이 북한에서 출범하였다.
1945년 10월 8∼10일 소련군사령관 치스챠코프의 제안으로 평안남도 31명, 평안북도 15명, 황해도 11명, 함경남도 11명, 함경북도 7명의 ‘5도인민위원회’ 대표 75명이 모여, ‘5도인민위원회연합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농업생산과 식량 성출문제, 군수공장의 민수공장으로의 개편, 금융재정문제, 지방기구의 정비․통일 등이 토의되었다. 이후 회의는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통일되고, 면․군․시․도 인민위원회의 위계구조가 결정되었다.
치스차코프는 ‘북조선5도인민위원회연합회의’에서 북조선 각 도 중앙을 창설할 것을 소련 당국에 제안하였고, 1945년 11월 19일 ‘북조선5도행정국’이 발족하여, 10개 국이 조직되고, 각 국의 국장이 임명되었다.
5도행정국은 공식적으로 서울의 인민공화국이나 중앙인민위원회와 소련군의 합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북조선의 각 도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 민정부 와의 교섭을 통하여 발족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5도행정국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후 북한에 친소공산주의국가체제가 갖춰지자 1947년 2월에 ‘임시’를 떼고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철군한 후 북한은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5도행정국이 조직된 다음날인 1945년 11월 20∼25일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이전에 5도행정국이 수립된 것은 기본적으로 북조선 내 사정에 따라 각 부문 간, 각 지역 간 행정을 조정, 연계할 필요성에서 조직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북조선 쪽이 선제한 것은 ‘서울중앙’의 대회가 대표하는 지역의 범위를 남조선에 한정되게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5도행정국은 공식적으로 서울의 인민공화국이나 중앙인민위원회, 소련군의 합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북조선의 각 도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 민정부와의 교섭을 통하여 발족하였다. 이는 최초로 소련군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의사 표시가 가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