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관리운동 ()

정치·법제
제도
해방 직후 노동자들이 일제 소유의 기업과 공장을 자주적으로 관리하였던 운동.
이칭
이칭
노동자자주관리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 직후 노동자들이 일제 소유의 기업과 공장을 자주적으로 관리하였던 운동.
개설

1945년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주민들에 의한 인민위원회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면서 일제 소유의 공장 및 생산기관에 대한 접수가 이루어졌고,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 일시적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일본인 기업가들이 철수함으로써 생산중단에 직면한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공장을 접수 · 운영하는 자주적 관리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일본인 자본가를 대신하여 공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자주관리운동에 많은 노동대중이 참여하였다. 인민위원회와 노동자 조직은 이미 공장관리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던 공장을 자체의 관할 아래 소속시키고 관리자를 임명하였고, 이 둘은 인적, 조직적 결합을 통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미 조직되어 있던 노동조합에 의거하여 공장위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나 공장관리위원회가 노동조합과 거의 동시적으로 결정되어 때문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지역에 따라서는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되어 공장관리권을 떠맡기도 했으나 그 직후 부정되었다.

내용

해방 직후 공업지대의 공장운영은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고,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주민들에 의해 치안유지와 민생안정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각 기업 및 공장 종업원들에 의해 조직된 공장위원회도 일제 소유의 기업,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하였다. 이러한 자주관리운동은 일시적으로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인민위원회와 공장관리위원회의 관계, 초기 노동조합과 공장관리위원회 관계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대규모의 중공업 기업은 소련군이 운영에 개입하여 감독하고 있었다.

변천과 현황

해방 직후 공업지대의 공장운영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주민들에 의해 치안유지와 민생안정을 위한 인민위원회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면서, 동시에 각 기업, 공장에서는 종업원 자신에 의한 접수가 이루어졌다. 통칭 ‘공장위원회’라고 불린 이러한 조직은 지방에 따라서 자치위원회, 운영위원회, 관리위원회, 경영위원회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종업원 자신에 의한 사업체 접수는 산업, 운수, 체신, 교육, 문화기관 등 거의 전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도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가 공포한 ‘인민정부 수립요강’에는 “일본인 소유공장에 대하여는 일본적 요소를 일소하고, 공장노동자와 기술자에게 관리시킨다. 기술부면에서 일본인이 필요한 경우, 이를 과도적으로 사역하지만, 조선인 기술자의 급한 양성이 필요하다.(제3항)”고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개인경영의 기술관은 허용하지만, 특별한 감시를 요한다.(제5항)”고 규정하였다.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자주관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소련군 방침에 의해 각 도의 인민위원회가 ‘적산몰수위원회,’ ‘적산관리위원회’ 등을 설치해 일본인 소유이던 공장 · 기업소 · 건물 · 재산 등을 접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10월 16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시정대강’을 발표하고 “일본제국주의자 및 친일분자가 소유한 토지, 회사, 금융기관, 공장, 광산, 탄광, 운수, 교통, 상업소, 기타 일체의 생산기관과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서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이미 공장관리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던 공장을 자체의 관할 아래 소속시키고 관리자를 임명하며, 일제 때 공장 이름도 조선 이름으로 바꾸었다. 함경남도인민위원회는 160개의 공장과 기업소를, 평안북도인민위원회는 69개의 공장과 13개의 탄광을 각각 해당 부서에 소속시켰다. 인민위원회와 노동자조직이 접수한 공장이 소련군의 직접 관리 하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북조선 지역에는 1930년대 일제의 대륙병참기지 정책에 의해 중공업시설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의 항복과정에서 대부분의 중요 공장은 시설이 파괴되어 가동이 중단되었지만, 소련 점령당국은 자체의 전문가, 기술자를 동원, 그 조업 재개에 주력하였다. 1945년 11월 27일 ‘북조선에서 중공업 기업의 최초 가동에 관한 북조선소련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르면, 기업운영에 관해 자세히 지시하고 있다. 소련군은 해당 책임자에게 조업개시를 위하여 기업의 가동 일정, 자재 및 기술 공급계획, 제품의 수송계획 등을 보고하고, 기술적 조언을 위한 전문가를 임명 · 배치하여, 식량 · 연료 · 교통 · 통신상의 제반 조건을 보장하며, 운영자금을 확보하도록 지시하였고, 가동된 뒤에도 재정 상황, 작업 진행상황 등을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반적으로 기업이나 공장 운영은 조선인 종업원의 자치조직이 수행하고 있었으나, 대규모 중공업 기업은 소련군이 운영에 개입하여 감독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좌익세력이 강하던 인민위원회에는 인적, 조직적 결합을 통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미 조직되어 있던 노동조합에 의거하여 공장위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나 공장관리위원회가 노동조합과 거의 동시적으로 결성되었으므로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는 초기 노동조합과 공장관리위원회가 미분화상태였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25일 평안남도당위원회 제1차 대표대회에서 초기 노동자에 의한 ‘공장관리권’을 인정한 것을 ‘조합주의’를 범했다고 자기비판 된 점에서 보면, 지역에 따라서는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되어 공장관리권을 떠맡았으나, 그 직후 부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소련군 점령정책의 방침으로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서동만, 선인, 2005)
「해방 후 사회주의세력의 경제체제 구상: 평등주의와 발전주의 사이에서」(김무용,『고려사학회』20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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