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근대 문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근대시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받아들이면서 우리 시가의 하나인 민요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하여 민중의 정서와 민요의 리듬을 근대 서정시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한국 근대 문학에서 민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백조』의 실질적인 발행인 홍사용이 ‘경상도 민요’라는 부제를 달아서 「생금생금 생가락지」(『백조』 2호, 1922.5)라는 전래 민요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또 ‘민요시’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개벽』 25호(1922.7)에 발표되면서 ‘민요시’라는 부제를 붙인 것이었다.
김소월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민요시’라는 용어는 이후 김억이 다음의 글에서 몇몇 시인들을 논의하면서 민요시라고 지칭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소월군의 시 「삭주구성」(개벽10월호)의 삼편 시는 군의 민요시인의 지위를 올리는 동시에 군은 민요시에 특출한 재능이 있음을 긍정시킵니다. (중략: 「삭주구성」, 「가는 길」 일부 인용) 우리의 재래 민요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도 아름답게 길이로 짜고 가로 역시 곱은 조화를 보여주었습니까! 나는 작자에게 민요시의 길잡이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중략)
로작군의 시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백조제3호)는 늦은 봄 3월에도 저무는 밤에 하소연하게도 떠도는 곱고도 설은 정조를 잡아서 아릿아릿한 민요체의 고운 리듬으로 얽어맨 시작입니다. 참기 어려운 그야말로 안타까운 듯한 순감의 황홀입니다.(김억, 「시단일년」, 『개벽』 42호, 1923.12)”
이상에서 김억은 김소월과 홍사용의 시를 통하여 민요시의 개념을 전통적인 민요조에 기반을 둔, 곱고도 설은 정조를, 아름답게 짜고 엮어서 만든 고운 조화를 이룬 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특질은 민요조라는 특성과 더불어 서정시라는 특징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근대시는 민요시라기보다는 민요조 서정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억은 위의 소론에서 민요조 서정시의 본질을 소월, 로작의 시를 통하여 설명하였다.
김억은 민요시라는 용어를 다시 자신의 역시집 『잃어버린 진주』(명문관, 1924)의 서문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즉 시의 종류로 민요시를 설정하고, 김소월의 「금잔디」를 예로 들어 민요시를 설명하고 있다. 또 김억은 소월의 시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인 「여름 저녁에 읊은 노래」(『영대』 2호, 1924.9) 등 4편 등에서도 ‘민요시’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후 민요시라는 용어는 보편화되어 주요한도 「가신 누님」(『조선문단』 1호, 1924.4)을 목차에서 동요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시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조선문단』 1~3호, 1924.10~12)에서도 민요․동요를 중요시한 신시를 지을 것을 강조한다. 김기진도 김억, 김소월, 홍사용, 주요한 등을 ‘민요시인’ 또는 ‘민요적 시인’이라고 지칭한다. 이와 같은 김억과 주요한의 민요시 운동보다 좀 늦게 김동환도 「동정녀」(『조선문단』 18호, 1927.1) 등 6편의 시를 민요․동요라는 부제로 발표하면서, 민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민요를 지향하는 근대시는 김억, 김소월, 김동환 등에 의해서 서구의 근대시를 넘어서 한국 근대 문학의 전통을 세우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1920년대 민요·동요의 중요성을 강조한 민요조 서정시 운동은 시문학사의 중요한 움직임이었으며, 「진달래꽃」에서 시작되는 민요조 서정시의 창작은 근대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뿐만 아니라 1930년대까지도 용어의 혼란은 시인, 논자들에 따라 ‘민요’, ‘속요’, ‘민요시’, ‘소곡(小曲)’ 등으로 표기되어 통일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