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분권(不分券) 1책의 필사본으로 인조대왕행장(仁祖大王行狀)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인조를 추모하고 인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서 순한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내용의 한문본이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이경석(李景奭)의 문집인 『백헌집(白軒集)』에 실려 있다. 한문으로 된 인조의 행장은 인조가 승하(昇遐)한 직후 이경석(李景奭)이 왕명을 받아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애초에 이경석(李景奭)이 한문으로 지었던 것을 언해한 것으로, 이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의 둘째 장에 남아 있다. 둘째 장에는 ‘孝宗大王親撰 仁宣王后張氏親寫’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의 내용은 인조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직접 글을 짓고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장씨(張氏)가 이를 직접 옮겨 적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의 마지막에 ‘距今二百六十年前’(지금으로부터 260년 전)이라는 문구가 있어 이 둘째 장의 기록이 1900년 경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친찬(親撰)’이라는 기록이 단순히 언해를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에 대한 기록 자체가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정말 효종대왕에 의해 17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사본이며 본문은 총 5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면 9행으로 첫 장에는 ‘先朝行狀全’이라 씌어 있고 둘째 장에는 ‘仁祖大王行狀’이라고 씌어 있다.
이 책에는 인조의 출생부터 승하(昇遐)까지 인조가 남긴 행적이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인조의 출생, 성장기의 품행, 광해군의 횡포, 인조의 반정(反正)과 왕위 등극(登極), 역적 처단과 백성 구제 및 인재 등용, 인조의 효성, 폐위된 광해군에 대한 예우, 형제애,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강연(講筵) 내용, 신하에 대한 대우, 백성에 대한 사랑,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피난,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 효종에 대한 가르침, 어진 정사, 인조의 승하(昇遐)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백성들의 애도를 마지막으로 글을 끝맺는다.
이 책은 한글로 기록된 임금의 행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행장은 한문 문체의 한 종류라 할 정도로 한문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한문 행장을 먼저 지은 후 나중에 언해를 하여 엮었기 때문에 이 책을 진정한 의미의 한글 행장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장의 내용이 한글로 전해지는 것 자체가 드물고 그것도 임금의 행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책은 국어학적으로 17세기 표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표기법상으로 체언의 곡용형은 주로 분철을 하고 용언의 활용형은 연철을 하면서 중철 표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초성에서는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가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종성에서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사용하는 7종성법을 적용하였다.
음운론적으로는 ‘눈믈, 브리다’처럼 아직 원순모음화가 적용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구개음화 현상이 적용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문법적으로는 중세국어의 ‘·어 잇·’ 구문이 굳어진 ‘·엇·’ 형태가 자주 보이며 어미 ‘·ㄴ다’가 중세국어처럼 2인칭 의문형 어미로 사용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대국어와 같이 평서형 어미로 사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또 문장의 주체를 높일 때 ‘ᄒᆞᄉᆞ오시고, ᄒᆞᄉᆞ오시니’, ‘ᄒᆞ오시니, ᄒᆞ오시며’와 같이 ‘·ᄉᆞ오시·’ 또는 ‘·오시·’ 형태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국어의 객체존대 선어말어미 ‘·ᄉᆞᆸ·’이 객체존대의 기능을 잃고 ‘·시·’와 결합하여 주체존대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