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1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3년 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 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 · 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28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1968년 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 지시’로 「공본작전비 제91호(1968.4.1)」에 근거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는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3년 4개월간 특수공작훈련을 받았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본래 ‘특수공작 기본계획서’에 의해 사형수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법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민간인으로 대체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예산지원과 정기적인 훈련 상태 점검을 담당하였고, 공군이 부대 운영과 훈련을 책임졌다.
실미도 사건은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및 보수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천에서 육군과 최초의 총격전을 벌인 후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오후 2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저지하는 군 · 경과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군 · 경과 실미도 공작원들과의 교전 결과,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그리고 공작원 20명이 사망하고, 생존 공작원 4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