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수는 1901년 소련에서 출생하였고,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기관지’ 『정로』의 주필이었고, 북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31일 김일성의 사회로 북조선로동당 제1차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을 때, 태성수는 상무위원 13명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기관지 책임주필로 임명되었다. 1946년 12월 6일 개최된 당중앙 상무위원회에서 ‘양곡수매사업’과 관련하여 『로동신문』 책임주필로서 사업의 선전해설사업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기에 문화선전성 부상에서 해임되었다가, 1956년 무렵부터 다시 『로동신문』의 책임주필로 취임했다.
1945년 10월 10일 ‘5도대회’에 모인 각 도의 인민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 대표자들 중 7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만 따로 모여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열었다. 당시 태성수는 소련공산당적을 가진 소련계 조선인으로서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당을 재건하자”는 김일성의 의견을 지지하였고, 이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을 때, 기관지주필 직책의 분국 집행부서 간부로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각 도 대표 818명의 참석아래 개최되었고, 태성수는 31명 주석단 중 한명으로 참가하여 중앙기관지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이후 1946년 10월 11일 결성된 ‘북조선기자동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11월 15일에는 북로당 중앙위원회․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고, 11월 18일 개최된 제3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선출된 위원 30명 중 한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1948년 8월 28일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태성수는 1950년 6․25전쟁 중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문화선전성 부상으로써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가 1956년 무렵부터는 다시 『로동신문』 책임주필로 활동하였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