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서구 ()

달서구 전경
달서구 전경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구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區).
정의
대구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區).
개관

동쪽으로 남구 대명동, 서쪽으로 달성군 다사읍과 고령군 다산면, 남쪽으로 달성군 가창면과 화원읍, 북쪽으로 서구 내당동과 접하고 있다.동경 128° 28′~128° 44′, 북위 35° 47′~35° 51′에 위치하며, 면적은 62.34㎢, 인구는 60만 264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2개 행정동(24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환경

전체적인 지세는 동남 편이 높고 서북 편이 낮다. 금호강이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대부분이 충적평야(沖積平野)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북쪽 달성군 다사읍과의 경계지대에는 와룡산(300m)과 궁산(253m)이 있고, 동남부에는 비슬산괴에 속하는 앞산(660m)·대덕산(584m)·청룡산(794m)·삼필봉(468m)등으로 이어진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진천천(辰泉川)과 금호강(琴湖江) 하류의 주변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넓은 충적평야이며, 두류산(131m) 공원 일대는 준평원상(準平原狀)의 침식평야이다.

진천천은 도원동 청룡산에서 발원하여 북서류 한다. 그리고 대곡지구를 거쳐,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총 유로 연장은 10.20㎞이고, 유로 면적은 81.20㎢이다. 과거에는 하류의 충적평야를 관류하면서 사행천(蛇行川)을 형성하였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실시된 하천정비 사업을 통해 직강하천으로 변모하였으며, 상류는 택지 개발로 반복개 하천이 되었다.

대명천은 대덕산 안지랑골에서 발원하여 대명동, 성당동, 본리동, 장기동을 관류해 낙동강으로 유입된다.1988년부터 대명천(大明川)의 달서구 구간인 성당1동에서 장기동까지 총 연장 2,671m의 도로가 복개되기 시작하여, 2005년 1월 완공되었다.

달서구 지역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겨울은 춥고 긴 반면, 여름은 매우 무더우며,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편이다.연 평균기온은 14.8℃, 1월 평균기온은 0.8℃, 8월 평균기온은 25.8℃이며, 연 강수량은 1,222.4㎜ 내외이다.(2015년 현재)

역사

청동기시대 유구와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상인동과 월성동 주변 구릉지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이는 월배 선상지가 청동기시대 이후 주거지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월배 지역의 청동기시대 대표적 유적지인 고인돌[支石墓]은월배선상지 전체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선단(扇端)부의 분포 밀도가 높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20세기 초까지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고인돌 외에 청동기시대 유적지로는 월성동 선사유적지를 들 수 있다. 이는 월배선상지 북쪽에 있는 해발고도 138m의 구릉성 산지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또 진천천의 구유로에 인접하여 석기 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재료를 얻기가 용이하였다.

철기시대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고분군은 월배선상지 선정(扇頂) 부근 침식구릉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나 그 분포 밀도는 고인돌에 비해 매우 낮다.

무문토기 유적은 주로 선상 지면에 분포하지만, 원삼국시대 유적은 대부분 선정 부근의 침식구릉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는 선상지가 빈번한 범람으로 농경지로서 유용성이 낮아지게 되어 거주지가 선상지에서 주변 침식구릉지로 옮겨간 결과이다.

신라시대에 달서화현 달불성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창군에 속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인 1143년(인종 21) 경산부(京山府)에 속했던 대구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 1)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1466년(세조 12)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하였다. 달서구 지역은 당시 대구도호부 관내 대구본부(大邱本府)의 달서면(達西面)·성서면(城西面)과 화원현(花園縣)의 감물천면(甘勿川面)·조암면(租巖面)·월배면(月背面) 등에 해당하였다.

달서구 지역은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도 대구군(1896)과 대구부(1910) 관할 하에 그대로 속했으나, 1914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5개 면이 달서면·성서면·월배면으로 통폐합되어 신설된 달성군에 편입되었다. 1938년에는 대구부의 구역 확장으로 달성군 달서면의 10개 동이 대구부로 편입되었는데, 현재의 달서구는 달서면을 모태로 하고 있다.

1957년에는 달성군의 성서면과 월배면이 대구시에 편입되었으나 1963년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의 직할시 승격으로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현재 달서구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달성군 성서읍과 월배읍 지역은 성서출장소와 월배출장소로 서구와 남구에 각각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 서구 내당동 일부와 성당동, 성서읍 전구역과 남구 월배읍 전구역이 하나로 묶여 대구의 일곱 번째 행정구인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성서공단 3차 단지 내 화원읍 구라리 일부가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특히 1988년 월성지구를 시작으로 상인, 대곡, 성서, 용산, 장기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1991년 4월 15일 달서구 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대구직할시 달서구가 대구광역시 달서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는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일부인 2.58㎢가 성서공단 3차 단지로 편입되면서 달서구의 총면적은 62.27㎢로 확장되었다.

1995년 7월 1일 초대 민선자치 구정이 출범하였고, 1998년에는 달서구 조례 제455호를 통해 월성동 일부가 상인동으로 경계조정되었다. 이후 2003년 달서구 조례 제539호에 따라 장기동이 장기동·용산1동·용산2동으로 분리되었고, 이곡동이 이곡1동·이곡2동으로 분리되어 행정동이 21개에서 24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대통령령 제18139호에 따라 대곡동 일부가 달성군으로 경계조정되었으며, 2005년 4월에는 달서구 조례 제647호에 따라 법정동 명칭이 파산동에서 호산동으로 변경되었다.

달서구가 거대 자치구로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배경으로는 1984년에 확정된 대구시 기본계획에 의한 송현, 월배, 월성, 대곡, 성서 그리고 상인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통, 공업, 집단 거주 단지 개발계획을 들 수 있다. 특히 상인동 일대는 택지 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었다. 상인 신시가지는 대구시 남서부 7㎞ 지점 달성군(고령, 창령) 방향의 간선도로변에 개발된 주택지구로 1993년 대부분의 아파트가 준공되었고, 신시가지에는 대구지하철 1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한편 상인지구 동쪽에는 송현지구가 1985∼1986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나 저층 아파트 중심이며, 규모도 작은 편이다.

유적·유물

대구 진천동 입석(大邱辰泉洞立石)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199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권11~12는 두보의 시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언해한 서적으로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권2와 동인지문사육(東人之文四六) 권7~9는 각각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권7은 아미타불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악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서적으로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은 17세기 초의 국어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국내 유일본으로서 가치가 높아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군공책(花園禹拜善義兵陣關聯資料-軍功冊)과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교지(花園禹拜善義兵陣關聯資料-敎旨)는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2002년 보물로 각각 지정되었으며,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과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은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된 서적이다.

신당동 석장승은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새워진 장승으로 대구에서 유일하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영제시조(嶺制時調)는 경상도만의 특성을 살린 시조로 1990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모필장(毛筆匠)은 특수하고 희소가치가 높은 붓의 제작기법을 인정받아 2004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전통사찰인 임휴사(臨休寺)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팔공산(八公山) 동수대전(棟藪大戰)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견훤의 추격을 피해 반야월(半夜月)과 안일사(安逸寺)를 거쳐 이곳으로 와, 기도를 드리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았다는 기원을 갖고 있다.

파호동에는 강창(江倉)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 있다. 강창은 원래 국가의 세곡(稅穀)이나 진휼미(賑恤米), 군량미(軍糧米) 등을 운송 및 보관하기 위해 강이나 하천변에 설치한 창고이다. 이곳에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을 두어 주·군(州·郡)의 조세를 각각 그 부근의 제창에 보관하였다가 다음 해 2월부터 조운(漕運)을 시작하여 강창(江倉)에 수송하여 서울로 상납(上納)하게 하였다. 이 강창마을도 과거 강창이 있던 곳이다.

또한 강창마을은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를 연결하는 나루마을이기도 하였다. 1965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제방이 없어 홍수가 잦았으나, 1966년 대구∼성주 간을 연결하는 폭 10.3m, 길이 245m의 강창교(江倉橋)가 착공되고, 4년 만인 1970년에 준공되면서 나루터는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서당이나 재실, 효부각, 지석묘나 입석, 전통가옥 등 총 22개의 비지정문화재가 입지하고 있다.

교육·문화

2015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65개교, 중학교 40개교, 고등학교 23개교, 특수학교 1개교, 전문대학 2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초등학교로는 대구 효성초등학교를 들 수 있다. 대구 효성초등학교는 1898년 대구 계산성당 교육관 내 한문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효시로 한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가톨릭 학교이다. 1908년 해성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사립 성립학교를 설립하였고, 1910년 여자부를 병설하여 대구 최초의 초등 여성 교육기관이 되었다. 1966년에는 남녀공학을 실시하였고, 1971년 중구 계산동에 본관 교사를 준공하였고, 1992년 달서구 송현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구교육대학교 대구 부설 초등학교는 1959년 5월 5일 남구 대명동에서 대구사범학교 부설 국민학교로 개교하여 1998년 12월 현재 위치인 달서구 도원동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2001년 3월 대구교육대학교 대구 부설 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또한 1946년 9월 대건초급중학교로 설립되어 1951년 분리된 대건중학교와 대건고등학교, 1949년 6년제 효성여자중학교로 시작된 효성중학교와 효성여자고등학교, 1962년 중구 봉산동에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로 설립된 대구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등 대구 지역에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들이 1980년대 이후 신흥 주택지로 급속하게 발전한 달서구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대구외국어고등학교는 1997년 달서구 신당동에 설립된 특수목적고이며, 이 지역 대학기관인 계명대학교는 1956년 남구 대명동에 계명기독대학으로 설립되어 1978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후, 1996년 2월 성서캠퍼스 신축과 함께 달서구 신당동으로 이전하였다. 계명문화대학교 또한 1962년 계명기독대학 병설 여자초급대학으로 설립된 후, 1970년 계명대학 병설 전문대학, 1979년 계명실업전문대학, 1989년 계명전문대학, 1998년 계명문화대학, 2013년 계명문화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현재 달서구 신당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종교시설로는 921년(신라 경명왕 5)에 창건된 임휴사(臨休寺) 등을 들 수 있다.

문화시설로는 두류공원 내에 1981년 개관한 두류도서관, 2006년에 개관된 도원동의 구립 도원도서관과 상인동의 달서어린이도서관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비롯한 공연시설과 전시시설, 지역 문화 복지시설 및 문화원·문화의 집 등이 있다.

그 외 문화시설로는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달서구 문화유산보존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어, 2002년 5월 12일 개관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2002년 보물로 지정된 화원우배선의병진군공책및관련자료(花園禹拜善義兵陳軍功冊및關聯資料) 4종 15점과 농기구 700여 점, 유품 500여 점, 장서 7000여 권 등 82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박물관 부지 내에 낙동서원(洛東書院), 열락당(悅樂堂), 덕양재(德陽齋), 의병장월곡우배선선생창의유적비(義兵將月谷禹拜善先生倡義遺蹟碑),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유적·유물이 위치하고 있다.

그 외 문화공간으로는 두류공원을 비롯한 어린이공원·근린공원·도시자연공원 등 총 154개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달서구를 둘러싼 앞산, 삼필산, 청룡산, 와룡산에는 각각 등산로가 개발되어 지역주민들이 체력단련 및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지역축제로는 1989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달서구민 한마당 축제’가 있다. 이 축제는 두류공원 내 야구장과 성서지역 운동장에서 번갈아 개최되며, 다양한 문화·체육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그 외에 1999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7∼8월경 달서구 내 공원 여러 곳에서 4∼5차례 개최되는 ‘한여름밤의 공원 음악회’와 두류공원 내 코오롱 야외음악당에서 개최되는 ‘달서구 청소년 음악회’ 등이 있다.

민속

달서구의 민속놀이로는 ‘상인동 달집태우기’와 ‘양강합수씨름대회’가 있다. ‘상인동 달집태우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마을 앞 동천에서 벌어졌는데, 동제를 지내고 개천에 나무를 모아 달집을 만들고, 달이 떠오르면 이를 태우며 액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상인동 달집태우기는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잊혀가던 것을 1997년부터 지역주민들이 ‘달ᄇᆡ 달맞이 축전’으로 재현하여 정월대보름에 행해지고 있다.

‘양강합수씨름대회’는 성서 지역과 고령군 다산면이 접하는 지점이자,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수하는 지점의 백사장에서 열렸던 씨름대회이다. 매년 5월경 모자리가 끝난 후에 날을 받아 마을 단위로 씨름대회를 개최했는데, 오늘날에도 매년 ‘달서구민 한마당 축제’에서 씨름왕 선발대회를 치르고 있다.

또한 신당동, 이곡동, 유천동, 월성동, 상인동, 도원동에서는 ‘줄당기기’가 음력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하여 졌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거의 중단되어 현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두류3동의 안땅골 사람들은 파종이 끝난 5월에 파종(播種) 당산제를 지냈고, 추수가 끝난 10월경에는 햅쌀로 만든 술과 떡을 준비하여 추수감사 당신제를 지냈다.

진천동에서는 매년 정월 초여드레 날과 정월대보름 하루 전날에 마을의 무탈·무병·풍년을 기원하는 ‘천왕대왕신제’를 지냈다. 이는 ‘용천제’라고도 불렸다.

장기동에는 200여 년 전부터 매해 음력 정월대보름마다 마을의 평온함을 기원하는 당고사를 지내왔던 성황당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황당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큰 당상’나무가 있었고, 이 성황당은 ‘작은 당상’이라 불렸는데, 당고사는 ‘큰 당상’과 ‘작은 당상’에서 차례로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성황당의 떡버들나무는 1982년 10월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그 주변은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설화·민요

대구지하철 1호선 상인역 동쪽에 위치한 대덕산(大德山)과 청룡산(靑龍山) 사이에는 ‘달비골’ 또는 ‘달배공’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에서 월배(月背)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깎아 세운 듯한 층암절벽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석샘’이라는 바위굴이 있다. 이 굴 속의 천장에서는 항상 같은 양의 물이 떨어지는데, 이 물은 위장병이나 피부병 같은 병에 특이한 효과가 있어 약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약수와 관련해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이곳 절벽 아래 석주암이란 암자에 주지승과 어린 동자승이 살고 있었고, 지금 약수가 떨어지는 천장의 바위틈에서 당시에는 쌀이 조금씩 떨어져 이 쌀을 하루 종일 모아 스님과 동자 두 사람이 세끼 밥을 지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의 쌀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나가면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만 떨어졌는데, 매일 밥만 먹고살던 동자승이 떡이 먹고 싶어 주지승이 없는 날, 많은 쌀을 얻기 위해 쌀이 나오는 틈을 마구 쑤셨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나와 이후 암자가 망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용산동 와룡산은 다사읍의 방천동과 서재동, 달서구의 용산동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는 산으로, 이 산과 주변의 다른 세 개의 산을 함께 보면 마치 용이 누워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이 산을 와룡산(臥龍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히 용머리에 해당되는 와룡산 꼭대기에 묘를 쓰면, 그 묘의 주인은 큰 부자가 되지만, 무덤 근처의 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으로 흉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그 주변 지역의 농민들은 와룡산에 올라가 꼭대기에 몰래 쓴 무덤을 찾아서 화장을 하곤 했다. 일제 말엽 어느 해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사람들이 와룡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처음 보는 무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무덤을 파내고 산을 내려와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에 곧 먹구름이 모여들고 천둥이 쳐 큰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외에도 이 일대의 선풍바위·비룡바위·원한바위 등 바위에 얽힌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와룡산 중턱에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까들락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주변에는 약 200평이 되는 평평한 잔디밭이 있다. 이 잔디밭은 어느 전쟁 때에 아군의 장수와 적군이 싸움을 했던 곳이라고 하며, 용두봉에는 장군들이 물을 길어 먹던 장군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퇴하면서 크고 넓은 암석으로 덮어버려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약 80여 년 전만 해도 용두봉 근처에는 장군들의 갑옷이 흩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구지하철 1호선 월촌역 옆 송현주공아파트 뒤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재실(齋室)이기도 한 낙동서원이 있는데, 이곳이 과거 월촌마을이었다. 이곳의 월촌 근린공원에는 ‘의병장월곡우배선선생창의유적비’가 있고, 그 뒤에는 의마비(義馬陴)가 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전부터 단양 우씨의 집성마을로 우배선(禹拜善)이 살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우배선과 그가 타던 말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배선은 살던 마을 근처 조암평야에는 물이 빠지고 나면 허허벌판이 되어 야생마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성질이 사나워 아무도 접근을 못했지만, 오직 우배선만이 이 말을 잘 다루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이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 그의 말은 총명하여 적의 화살이 날아오면 무릎을 꿇어가며 그를 여러 차례 구해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우배선은 의병장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이 되었지만,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가 죽자 이 말도 먹이를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사흘 만에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사람들은 이 말을 의로운 말이라고 하여 무덤을 만들고 이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의마총은 일제 말기 상인 못 확장 공사로 수몰되고 말았으며, 그 후에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 못가에 대신 의마비를 세워 현재 전해지고 있다.

한편 달비골 임휴사에서 산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측 산 중턱에 ‘원기사’라는 암자가 있는데 그 옆에 천연 동굴이 있다. 이 굴에는 사시사철 깨끗한 샘물이 흘러나와 사람들은 이 굴을 황룡굴(지금의 석정 약수터)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도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신라시대, 동굴 앞 암자에 남해의 용자 황룡이 살면서 스님(원광국사)의 시봉을 들며 수도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알게 된 남해의 용녀 청룡은 황룡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지만 스님이 꾸중하여 만나지 못하고, 맞은편 청룡굴에서 황룡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즈음 이 지역이 큰 가뭄으로 산천초목이 마르고 기아와 괴질이 돌아 스님이 청룡에게 비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를 안 옥황상제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사자를 보냈으나 스님이 사자를 꾸짖어 보냈고, 사자는 옥황상제의 영을 미처 뿌리치지 못해 벼락을 내렸는데, 마침 청룡굴에 함께 있던 황룡이 이것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로 황룡굴은 오늘날까지 보존이 잘 되어 있으나 청룡굴은 부서진 돌들이 돌밭을 이루고 있다.

송현2동의 옛 이름은 구암리(九岩里)로, 이곳에 있는 송현지(松峴池)는 원래 곶감샘으로 불리었다. 이 샘에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대구로 곶감을 팔러 오던 곶감 장수가 오다가 너무 갈증이 나서 곶감 짐을 짊어진 채 엎으려 샘물을 마시려다가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달서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는 나무꾼 소리, 모찌는 소리, 모내기 소리, 보리베기 소리, 보리타작 소리, 논매기 소리, 망깨소리, 삼삼는 소리 등 농경생활에 따는 노동요(勞動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 자장가, 동요, 시집살이의 한, 꽃노래 등 아녀자들이 부르던 소리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평야지역인 이 지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일꾼들이 많았기 때문에 타 지방 민요들도 함께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 민요들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산업·교통

1988년 개청할 당시 달서구 총면적은 59.69㎢로 그중 경지 면적이 15.1㎢(25.3%)를 차지할 만큼 농업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농업의 중심지는 성서, 월배 일대의 충적평야 지역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송현 주공, 성당 주공을 시작으로 한 월성, 상인, 성서, 장기, 대곡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성서공업단지의 개발로 제조업이 급격하게 발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 1·2호선 건설, 주거·상업 지역의 발달에 따른 대형 할인점 및 백화점 입점에 따라 3차 산업이 지역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 전형적인 도시형 산업구조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도시화의 역사가 다른 구에 비해 짧고, 도심 지역(중심 업무지, CBD: Central Business District)과 떨어진 외곽지역이기 때문에 아직은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농업지역은 진천동, 도원동, 월성1·2동, 장기동이며, 쌀·보리·채소류의 재배와 소·돼지·개·닭 등의 가축사육이 중심인 도시근교농업의 특성이 강하다.

2015년 현재 달서구의 총 산업체는 3만 4391개이고, 총 종사자는 16만 4755명이다. 업체 수에 있어서는 도매 및 소매업체가 총 7527개로 전체의 22%를 차지하여 비율이 가장 높고, 그다음으로 부동산·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19.6%), 숙박 및 음식점업(19.1%), 운수 및 통신업(14.8%), 제조업(13.2%) 그리고 기타 산업(11.1%)의 순이다.

그러나 종업원 수에 있어서는 제조업 종사자가 총 5만 4635명(33.2%)으로 그 비중이 가장 높고,그다음으로 기타 산업(28.1%), 도매 및 소매업(13.8%), 숙박 및 음식점업(10.8%),운수 및 통신업(7.7%), 부동산·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5.7%)의 순이다. 이와 같이 달서구의 제조업은 업체 수의 비중은 낮지만 종사자가 5만 4635명으로 전체 종사자의 약 33%를 차지하여 지역 산업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사자 수에 있어서는 대구광역시의 전체 시·군 중에서 그 비중이 가장 크다. 따라서 북구와 더불어 대구공업의 핵심 지역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제조업의 업종별 구조를 살펴보면, 대구 지역의 전반적인 업종별 구조와는 달리, 업체 수와 종업원 수에서 기계공업의 비중이 섬유공업보다 크다. 2003년 말 현재 달서구의 제조업은, 사업체 수에서 기계·금속업이 전체 제조업의 42.0%(3,038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섬유업이 36.9%(2,671개)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종업원 수에서는 섬유업이 전체 제조업의 42.5%(7만 1402명)로 가장 높은 비중을 나타내고, 기계·금속업이 37.4%(6만 2761명)로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은 월성2동과 이곡동에 집중적으로 입지하고 있고,그다음으로 장기동, 월성1동, 신당동, 진천동 등의 집적도가 높다. 이들 지역의 제조업 집적도가 높은 것은 성서산업단지 1차 단지는 이곡동을 중심으로 장기동과 신당동에 걸쳐, 성서 2차 단지는 월성2동을 중심으로 신당동과 이곡동에 걸쳐, 그리고 성서 3차 단지는 신당동을 중심으로 월성2동에 걸쳐 조성되어 있으며, 월성1동과 진천동 일대는 과거부터 월배 공업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달서구의 제조업은 성서산업단지 조성으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산업단지는 대구의 공업단지 중 가장 늦은 1984년 1차 단지 조성을 시작하였으나, 1993년 2차 단지, 2001년 3차 단지, 2006년 4차 단지에 이르기까지 갈산동 외 10개 동에 걸쳐 총 4개의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여 우리나라 동남권 최대의 지방 산업단지로 부상하였다.

2015년 현재 기계 금속, 자동차 부품, 섬유, 화학, 전기, 전자, 목재, 종이, 안경, 음식료 등 다양한 업종의 총 2,425개 업체, 5만 4744명의 근로자가 연간 9조 5천억 원의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 13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산업단지 내 업종별 구성을 보면, 조립금속 업체가 822개 업체(32.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섬유 647개(25.4%), 운송장비 353개(13.9%), 전지전자 174개(6.8%), 비금속 143개(5.6%) 그리고 기타 407개(16.0%) 업체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성서산업단지는 종래 섬유산업 중심의 대구 지역 산업구조를 다원화하고, 고도화하기 위하여 기계공업 중심의 첨단산업단지로 조성·발전되어 왔다는 점에서 대구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교통은 관내를 구마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경부·중앙·88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또한 국도 5호선 및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통과하고, 대구광역시의 동서 간 간선도로인 달구벌대로와 앞산순환도로를 비롯한 간선도로가 발달해 있다.

관광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는 두류산과 금봉산을 중심으로 총면적 165만 3965㎡에 걸쳐 조성된 두류공원을 들 수 있다. 이 공원은 당초 1965년에 지정되어,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두류공원은 대구광역시의 명소인 이월드와 문화예술회관 그리고 두류운동장 등 위락·문화·교양 및 체육시설을 고루 갖춘 도시근린공원으로서 133종 15만 본에 달하는 다양한 수종의 조경 수목과 4계절 꽃이 피는 가로, 성당못 5색 수중 분수 등으로 여름철 시민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인조잔디축구장을 갖춘 두류운동장 외에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유도관, 롤러스케이트장, 크로스컨트리 경기장, 골프 연습장 등 각종 체육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은 1950년 5월에 개관한 복합적 문화예술공간으로 부지 6만 6100㎡에 대극장·소극장·전시실·국제회의장·예련관이 입지하고 있다. 연중 다양한 전시·공연 행사와 더불어 월간 『대구문화』를 발간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 예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995년 개장한 우방타워랜드는 2010년 이월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두류공원 내에 위치한 전국 최대 규모의 83타워(대구타워)를 갖춘 유럽식 도시공원으로, 83타워 외에도 다양한 놀이시설을 갖추어 대구시를 대표하는 테마파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대곡동 대구수목원은 기존의 쓰레기 매립장에 자연생태환경을 복원하여 시민들의 자연학습 공간과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2년에 개장되었다. 특히 대구시에서 운영하는 공립 수목원으로써 내방객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생태환경자연학습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목원 내에는 약초원, 활엽수원, 침엽수원, 야생초화원, 화목원, 방향식물원, 괴석원, 죽림원 등 21개의 주제를 가진 전문수목원들이 있으며, 식물 종수는 2015년 현재 목본류 450종, 초본류 1,300종 등 총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실내 전시물로는 선인장, 분재, 수석·야생화 사진·식물종자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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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구사』(대구광역시 달서구사편찬위원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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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백서』(대구광역시 달서구,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대구시사』(대구광역시, 1995)
『대구행정구역변천사』(대구광역시, 199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대구광역시(www.daegu.go.kr)
대구광역시 달서구(www.dalseo.daeg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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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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