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대구광역시) (())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구광역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區).
정의
대구광역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區).
개관

동쪽으로 중구, 남쪽으로 달서구, 서쪽으로 달성군, 북쪽으로 북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1′∼128°35′, 북위 35°51′∼35°52′으로 대구광역시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17.33㎢이고, 인구는 8만 4189세대 16만 4513명(2024년 1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서구 평리동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환경

대구분지 서쪽에 위치한 와룡산을 제외하고는 크게 높은 산이 없고, 대부분 완만한 지형이다. 지질은 호수에서 퇴적되어 고결된 셰일 · 사암(砂岩) · 역암(礫岩) 등의 수성암인 상부대동계(백악기-상부쥐라기) 신라통 대구층을 기반암으로, 섬록암과 반암의 염기성암맥류가 관입 접촉하고 있고, 부정합으로 4기 현세통 신기하성층이 피복되어 있다.

대략 1억 년 전에 이 지역은 경상분지에 속한 호수였으며, 북서쪽으로부터 공급된 퇴적물들이 지속적으로 퇴적되었다. 당시 인접한 남쪽의 앞산과 최정산 일대에서는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지각변동이 심하게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의 격심한 지반운동 이후 대체로 안정된 환경이 유지되다가 신생대 중기 백악기 이후 지반 융기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분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쪽의 화강암 지역은 마그마가 관입할 때 열변성 작용을 받은 부분에 보호를 받아 삭박이 지체되어 아직도 높은 산지의 경관을 유지하고 있고, 남쪽의 앞산과 최정산 지역은 안산암과 같이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암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발고도 1000m 내외의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퇴적암 지역인 현재의 대구분지는 빠르게 삭박되어 낮아졌다. 따라서 현재는 해발고도 100m 이하의 파랑 상의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도시화가 진전되기 전 서구 지역의 구릉지는 주로 밭이나 묘지 등으로 이용되었는데, 기반암 위에 얇은 토양층이 피복되어 농업생산성은 매우 낮았다.

구릉지 사이에는 곡저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이 지형면의 토양은 퇴적암의 풍화작용으로 생성된 점토(Clay)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도시화 이전에는 주로 논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곡저평야를 흐르는 하천은 분수계의 해발고도가 낮고 유역 분지가 좁아서 유량이 부족해 곡저평야 상류부에 많은 저수지가 축조되었으나, 도시화로 현재는 이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와룡산에는 팔공산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화강암이 관입되었다. 현재 이 산은 분수계가 북쪽으로 트인 말발굽 형태를 띠고 있다. 이것은 화강암이 관입할 때 열접촉 변성작용을 받은 변성암이 개석을 받아 제거되고, 그 아래에 피복된 화강암이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빠르게 풍화작용을 받아 오목한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형 형성에는 금호강의 측방침식작용이 크게 기여하였다.

하천은 북구와 경계를 이루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이 있으며, 내당동과 비산동 구릉지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서부정류장 방향으로 서류해 상리동에서 금호강과 합류하는 유로연장 3.5㎞의 달서천(達西川)이 있다. 금호강과 달서천을 제외하면 지역 내 하천의 발달은 미약한 편이다.

대구 지역의 경우 연평균 기온은 11∼13℃, 연평균강수량은 900∼1,100㎜로 적은 편이며, 8월 평균기온은 31.3℃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이와 같이 대구가 여름이 특히 무덥고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 것은 분지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역사

서구 지역의 선사시대 유물로는 1974년 평리동 구릉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발견한 것을 비롯하여 초기 철기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초기 국가 형성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달성토성(達城土城)이 비산동 일대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1세기 이후에는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서구의 평리동과 비산동의 구릉지대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인 685년(신문왕 5) 서구 지역은 중구 및 동구, 남구, 북구, 그리고 달서구와 함께 위화군(喟火郡) 달구화현(達句火縣)에 속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수창군(壽昌郡)의 대구현(大丘縣)에 속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인 1143년(인종 21)에는 대구현의 현치(縣治)에 속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대구 지역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419년(세종 1)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었고, 1466년(세조 12) 다시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서구 지역은 대구대도호부의 서중면(西中面)의 노곡리(魯谷里), 부암리(傅巖里), 비산리(飛山里), 용천리(龍川里), 원대리(院垈里), 평리(坪里) 지역과 달서면(達西面)의 괘이리(掛耳里), 상리(上里), 이현리(梨峴里), 중리(中里), 신기리(新基里) 지역에 해당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중면과 달서면이 통합되어 달성군 달서면이 되었다. 1938년 1월 2일에는 달서면 10개 동이 대구부에 편입되고, 이곳을 관할하는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어 현재 서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후 1938년 11월 2일에는 출장소 설치 부조례에 따라 대구부 서부출장소가 발족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대구부 서부출장소는 대구시 서부출장소로 개칭되었고, 1951년 6월 12일에는 북부출장소 관할이었던 조야동이 서부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부출장소가 서구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일 원대동이 원대1, 2, 3가동으로 분동 되었다. 1966년 1월 1일에는 원대3가동이 3, 4, 5, 6가동으로 다시 분동 되었으며, 1970년 7월 1일 내당동이 내당1, 2, 3, 4, 5구로, 비산동이 비산1, 2, 3, 4, 5구로 각각 분동 되었다.

1975년 10월 1일에는 금호강이 구계(區界)로 설정되면서 금호강 남쪽의 원대4, 5, 6가동과 금호강 북쪽의 조야동, 노곡동은 북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내당동 1, 5구는 내당1, 4, 5동으로, 비산동 1, 3구는 비산1, 3, 6동으로 재편되었고, 평리동은 평리1, 2동으로 분동 되었다. 1979년 1월 1일에는 비산5동이 비산5, 7동으로, 평리1동이 평리1, 3동으로 각각 분동 되었고, 같은 해 5월 1일에는 평리2동이 평리2, 4동으로, 원대1, 2, 3가동이 원대1·2가와 원대3가동으로 각각 분동 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성서읍 전역을 관할하는 성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2년 9월 1일에는 내당1동이 내당1, 6동으로, 평리3동이 평리3, 5동으로 분동 되는 한편, 성서1, 2동과 본리동이 설치되었다. 1983년 3월 15일 성서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성서출장소 구역에 성서3동이 설치되었으며, 7월 1일에는 구청이 비산동에서 평리동으로 이전 · 신축되었다.

1985년 12월 1일 성당동이 성당1, 2동으로, 내당6동이 내당6, 7동으로, 상중리동이 상이동과 중리동으로 각각 분동 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남구 송현동 일부가 서구 성당동에, 남구 월성동 일부가 서구 본리동에 편입되고, 서구 성당동 및 본리동의 일부는 남구로 편입되었다.

1988년 1월 1일 달서구가 신설되어 서구에 속해있던 성서 전역과 대서로 남쪽 내당동 일부 및 성당동이 달서구로 편입되었으며, 내당7동은 내당4동으로 행정동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일 서구는 기초자치 단체인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1992년 9월 1일 서구의 평리5동이 평리5, 6동으로 분동 되었고, 1995년 1월 1일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서구가 되었다. 1997년 1월 1일에는 내당2동과 내당3동이 내당2·3동으로, 비산2동과 비산3동이 비산2·3동으로, 원대1, 2가동과 원대3가동이 원대동으로 각각 통합되었다. 한편 1998년 9월 25일 과소행정 운영동 통합(구조례 제440호)으로 상이동과 중리동이 상중이동으로 통합되었다.

유물 · 유적

지정문화재로는 날뫼북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과 천왕메기(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9년 지정)가 있다.

날뫼북춤은 조선 중기부터 현재의 비산동 원고개를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민속춤이다. 비산농악과 그 기원을 같이 하지만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에 맞추어 북만 가지고 추는 춤이라는 것이 특이점이다.

‘원고개’란 달성(達城)과 금호강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는 ‘서울 나들길’이었다. 따라서 고을 원님이 새로 부임하거나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되돌아갈 때는 반드시 원고개를 지나갔다. 오래 전, 선정을 베풀어 특히 주민들의 흠모를 받던 어느 원님이 병사하자 주민들이 원고개에 무덤을 써 넋을 위로하고, 그 공을 기리고자 해마다 제삿날에 이곳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며 혼을 달랬다고 하는데, 이것이 날뫼북춤으로 전승되었다고 전해진다.

날뫼북춤의 인원은 북 12명, 쇠 1명, 장구 1명, 징 1명으로 구성된다. 덩더꿍이, 자반득(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의 순서로 연행되며, 1984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천왕메기는 비산동 일대 주민들이 예부터 받들어 온 기천왕, 중천왕, 말천왕에 대한 정초의 지신풀이이다. 약 400년 전 비산동 일대에는 가뭄과 돌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마을 사람들은 중천왕 자리에 당집을 짓고 치성을 드렸으며, 천왕에 대한 치성으로 길목에 있는 당집에 돌을 던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던진 돌이 쌓여 조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매년 정초에 제물을 차리고 천왕제를 지내던 풍습이 생겨났는데, 도시 발전과정에서 천왕목과 사당, 조산 등은 사라지고 천왕메기 춤사위만 전승되었다.

비산동의 천왕메기는 사당의 앞마당에서 흥겨운 가무로서 판굿을 벌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 마을굿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초의 대내림과 제관 선출에 이어, 보름날 질굿, 문굿, 제사, 천왕메기(지신밟기), 판굿(마을굿)의 절차로 연행된다.

이 가운데 대내림, 질굿, 판굿은 농악만의 절차이고 문굿과 천왕메기는 지신풀이이며, 제사는 유교식 예식이다. 인원은 쇠 3명, 징 2명, 북 10명, 장구 5명, 기수 3명, 축관 1명, 소고 11명, 대감 1명, 각시 1명, 포수 1명, 대잡이 1명, 대평소 1명 등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9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서구 지역 와룡산 북편 능선에 위치한 상리동 고분군에는 지석묘와 같은 고분 여러 기가 있으나, 도굴꾼들에 의해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그 원형을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전문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고분들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 달성 고분군, 비산동 유적 등이 있으며,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평리동 청동기 유적 등이 있다.

교육 · 문화

1919년 3월 25일, 대구달성보통학교(현재 달성초등학교)와 같은 해 6월 1일 대구여자보통학교(현재 서부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 5일 사립 남명보통학교(현재 대성초등학교)는 1946년 3월 29일 교명을 개칭하고 해방까지 67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편 대구달서초등학교(현재 인지초등학교)는 1943년 4월 1일 개교하였으나 광복까지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2016년 현재 24개의 유치원을 비롯하여 17개 초등학교와 9개 중학교, 6개 고등학교 및 한국폴리텍6대학 등의 교육기관이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1992년 12월 23일 개관한 서부도서관이 평리3동에 입지해 있다. 서부도서관은 종합자료실, 향토문학관, 디지털자료실, 연속간행물실, 어린이열람실, 장애우열람실, 시청각실과 이동문고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평생교육 차원의 문화행사와 교양강좌 등을 개설하여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이현동에는 1998년 3월 5일 개관한 서구문화회관이 위치하고 있다. 서구문화회관은 공연장과 더불어 전시실, 시청각실, 취미교실, 체력단련장, 야외공연장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현공원 내에 입지한 서구청소년수련관은 각종 동아리 활동을 위한 청소년 문화의 집과 문화교육 및 생활체육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2000년 3월 21일 개원한 서구문화원도 이현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찾아가는 문화마당을 비롯하여 각종 음악 및 연극공연을 펼치고 있다.

문화행사로는 전통문화를 계승 · 발전시키기 위한 날뫼북춤과 천왕메기의 정기공연과 전통 민속문화 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행사로 푸른음악회, 청소년 어울마당, 허수아비 축제, 길거리 농구대회 등이 있다. 그 밖에도 한여름 밤의 콘서트, 가을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복지시설로는 1992년 개관한 내당1동 서구종합사회복지관, 1999년 개관한 원대3가 서구제일종합사회복지관, 2004년 내당2·3동에 개관한 서구장애인재활교육센터 등이 있다.

민속

비산농악은 날뫼마을이라 불리던 현재의 비산동 일대에서 자생한 농악이다. 예부터 날뫼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당에서 당산제를 지냈는데, 이것에 모태를 두고 비산농악이 발전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비산농악에는 웅장한 가락과 절도 있는 연기, 우직하고 투박한 영남 사람들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대략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전쟁 중 관련 자료들이 모두 사라졌고, 오늘날과 같은 틀이 마련된 것은 휴전 후 상쇠 최봉수를 중심으로 임문구, 김용배, 김수배 등이 다시 뭉치면서부터이다.

인원은 쇠 4명, 징 4명, 북 10명, 장구 6명, 벅구(소고) 12명, 잡색 3명, 태평소 1명, 기수 9명 등 총 49명으로 구성되며, 거리 순서는 질굿기군악에서 덕석말이에 이르기까지 15개 거리이다. 복장은 모두 삼색 채복(彩服)에 벅구꾼은 상모를 쓰고, 그 외 모든 잽이는 흰 고깔을 쓴다. 잡색의 경우, 각각 맡은 역할에 따른 의상을 입는다.

설화 · 민요

서구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로는 비산(飛山)동의 지명이 유래된 ‘날뫼’마을의 기원설화와 달서천의 청어에 대한 전설이 대표적이다.

‘날뫼’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한 아낙네가 달서천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음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낙네가 빨래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니 서쪽에 커다란 산이 둥둥 날아오고 있었다. 아낙네가 자신도 모르게 산이 날아온다고 소리치자 날아오던 산이 갑자기 내려앉아 버렸다. 이때부터 이산을 ‘날아온 산(飛山)’이라 하여 ‘날뫼’라 불렀고, 그 동네 이름은 ‘날뫼’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날뫼’마을은 한자 지명으로 전환되어 비산동(飛山洞)이 되었다. 이 날뫼마을 기원설화는 우리나라 상고(上古)시대의 신모신앙(神母信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명 전설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달서천의 청어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달성 앞을 흘러 금호강으로 들어가는 달서천은 물이 매우 맑아, 빨래는 물론 채소도 씻어 먹을 수 있었다. 물이 맑다 보니 민물고기는 물론이고 바다에 사는 물고기까지 산란기가 되면 알을 낳으러 낙동강과 금호강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 그렇게 물이 맑은 시절, 달서천 부근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마음씨 곱고 인정 많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과부의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과부는 손님이 왔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맛있는 반찬은 구할 수 없고, 따뜻한 밥이라도 정성껏 대접하자는 생각으로 물을 길으러 샘으로 갔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있는데, 유난히 묵직한 느낌을 받아 끌어올려 보니, 두레박 속에 큰 청어 한 마리가 담겨었다. 이에 과부는 크게 기뻐하며 그 청어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귀한 손님을 대접하였고, 그 뒤에도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이 샘물의 깊은 곳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용왕이 과부의 후덕한 마음씨를 기쁘게 여겨 청어를 보내 준 것이라고 믿었고, 이 샘을 ‘청어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업 · 교통

2015년 현재 토지이용 현황을 보면, 총면적 17.52㎢ 중에서 주거지역이 42.8%로 가장 넓고 녹지지역이 24.8%, 공업지역이 23.4%, 상업지역이 9%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지목별 현황은 도시지역의 특성상 대지가 34.2%, 공장이 15.4%로 구성비가 높고, 전답을 포함한 경지가 4.4%로 구성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한편 도로율은 19.2%이며, 임야 11.5%, 기타 15.3%의 구성비를 차지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총 사업체는 2만 123개로, 종사자는 7만 4910명이다. 분야별 사업체 수 및 종사자 수의 구성에 있어서는, 제조업이 3,278개 업체에 2만 1328명, 도매 및 소매업이 5,793개 업체에 1만 4190명, 숙박 및 음식점업이 3,525개 업체에 7381명, 운수업이 1,825개 업체에 5,255명, 기타 공공 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이 2,542개 업체에 4,715명 등으로 나타나 업체 수로는 도매 및 소매업이 28.78%로 가장 많고, 종사자 수는 제조업이 28.47%로 가장 많다.

또한 제조업의 업종별 현황을 보면, 섬유가 529개 업체(44.3%)에 종사자 수 1만 2865명(61.9%)으로 가장 많고, 의복 및 모피가 177개 업체에 종사자 수 2,031명, 조립금속제품이 138개 업체에 1,435명, 기타 기계 및 장비가 99개 업체에 1,193명 등으로 나타난다.

일찍부터 서대구공단과 비산염색공단 등이 조성됨에 따라 대구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어왔고, 현재도 대도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이 가장 높다.

서대구공단은 1978년 도시계획에 의해 상이동과 중리동에 지정된 임의 공단으로, 흩어져 있는 시내의 여러 공장들을 이곳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2004년 기준으로 340개의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섬유와 기계 관련 업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기준으로 조성 당시의 공장 용지 중 약 48.5%가 용도 전환되어, 공단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산염색공단은 염색전용 산업단지로, 1980년 평리6동에 조성되어, 2015년 현재 124개의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공동시설로는 발전설비용량 73.1㎿ 규모의 열병합발전소와 1일 10만 5000㎥를 처리할 수 있는 공동폐수처리장, 그리고 한국염색기술연구소가 위치하고 있다.

특히 한국염색기술연구소는 섬유산업 중 가장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염색가공분야의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중앙정부, 지방정부(대구광역시, 민간, 대구염색산업단지 관리공단)가 국내 최초로 제3섹터 방식으로 평리6동에 1994년 설립하였다. 염색가공현장의 애로기술 및 문제점 해결, 염색가공 시제품 생산, 폐수처리기술의 개발뿐만 아니라 차세대 염색가공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리동에는 1977년 도립기관인 경상북도 섬유기술 전문훈련소를 모태로, 생산기술 개발과 섬유기술인력 양성을 통한 섬유산업구조의 고도화, 국제경쟁력 제고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된 전문 생산기술연구소인 한국섬유개발연구원이 위치해 있다.

이들 연구기관은 그동안 대구 섬유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요 상업시설로는 할인점 3개소를 비롯하여, 내당1동 반고개시장, 내당2·3동 새길시장, 내당4동 삼익상가, 비산2·3동 서부시장, 비산7동 만평시장, 평리3동 서구시장, 대평리시장, 평리4동 중평시장, 신평리시장, 평리5동 중리시장, 평리6동 이현시장, 원대동 원대시장, 원대신시장, 내당동 두류1번가 등이 있다.

서구 지역의 농업을 살펴보면, 전체 농가는 1275호이고, 농가인구는 4330명인데, 이들 농가 중에서 전업농은 전혀 없으며, 모두 겸업농가이다. 농업의 중심 지역은 내당4동으로 총 168호이고 농가인구는 561명이다. 한편 전체 농지 21.5㏊ 중에서 밭이 11.5㏊, 논 10.0㏊이며, 가구당 평균 규모는 겨우 0.017㏊로 극히 영세하다.

교통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으로서 관내에 서대구역이 있어 편리하다. 아울러 상리동에 서대구인터체인지가 설치되어 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광주대구고속도로 및 중앙고속도로 등 4개의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광역 교통망 체계는 양호한 편이다. 또한 대구광역시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고, 시내버스 노선망도 발달되어 있어 대중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관광

대구광역시의 다른 지역에 비해 관광자원이 적다. 그러나 조선 초기 대구 출신의 대학자였던 사가 서거정(徐居正)은 당시 대구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열 곳을 소재로 하여 ‘대구10영(大丘十詠)’을 노래하였는데, 오늘날 원대동의 기원이 된 ‘대노원(大魯院)에서의 손님 보내기(櫓院送客)’를 그중 제8경으로 소개하였다.

그 내용은 “관도연연유색청(官道年年柳色靑, 관도에 해마다 버들 빛이 푸르고) / 단정무수접장정(短亭無數接長亭, 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이 수없이 장정을 이었네) / 창진양관각분산(唱盡陽關各分散, 이별곡 다 부르고 서로 흩어지니) / 사두지와쌍백병(沙頭只臥雙白甁, 모래밭 가에 두 개의 흰 술병만 누웠구나)”이다.

그 외 관광위락 시설로는 2015년 현재 22개의 도시공원이 있는데, 총 면적은 42만 7000㎡이다. 전체 공원 중에서 4개의 근린공원과 17개의 어린이공원은 이미 조성이 완료되었으며, 1개의 도시자연공원은 계획 중에 있다. 특히 1998년 조성된 이현동 이현공원은 다목적 운동장을 비롯하여 서구문화회관, 체력단련실, 산책로, 정구장, 잔디광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많은 구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내당동 감삼공원은 테니스장과 노인정, 휴게시설 등을 갖춘 도심 속 공원이다. 이 밖에도 중리동 상리공원, 평리동 평리공원, 와룡산 도시자연공원 등이 있다.

내당동 큰장길 침구류 명물거리는 2004년 서구 명물거리 제1호로 지정되었다. ‘큰장’은 중구 대신동의 서문시장을 일컫는 말로, 이곳의 침구류 상가는 지난 1990년대부터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현재 960m의 거리에 70여 개의 침구류 업소가 밀집해 있으며, 이들 업소로부터 하청을 받아 제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전국적으로 800개가 넘을 정도로 대규모이다.

이 밖에 내당2·3동 반고개 구길에는 30여 년 전부터 무침회 골목이 형성되었으며, 중리동에는 곱창마을이 유명하다. 이러한 명물거리들은 단순한 경제적 기능을 가지는 산업집적지일 뿐만 아니라 관광위락 명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지역축제로는 1993년부터 매년 5월 초 개최되고 있는 날뫼축제가 있으며, 지역 차원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천왕메기굿을 재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동민한마음축제와 구민한마음달리기대회도 개최되고 있다.

주요 체육시설로는 9개의 체육공원을 비롯하여 학교시설 61개, 직장시설 14개, 공공시설 1개, 개인시설 191개 등이 있으며, 1995년 개장한 이현동 구민운동장은 축구장, 씨름장, 농구장 등을 갖추고 있어 다목적 운동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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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통계연보』(대구광역시 서구, 2008)
『문화유적분포지도』(대구광역시·재단법인 영남문화재연구원, 2006)
『통계연보』(대구광역시,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대구시사』(대구광역시, 1995)
『대구행정구역변천사』(대구광역시, 199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대구광역시(www.daegu.go.kr)
대구광역시 서구청(www.dgs.go.kr)
집필자
이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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