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관 ()

목차
출판
제도
조선시대 서적을 교정하고 책판을 보관하던 관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서적을 교정하고 책판을 보관하던 관청.
내용

고문관(考文館)은『동궐도(東闕圖)』에 살펴보면, 창경궁(昌慶宮) 도총부(都摠府)의 동쪽에 담장으로 둘러 친 안에 남북 방향으로 세워진 맞배집으로, 다음의 기록들에서 고문관의 설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한경지략(漢京誌略)』의 기록을 보면 주자소(鑄字所) 옆에 있는 건물을 고문관이라 하고, 어느 시기에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혹은 이곳이 옛 홍문관(弘文館)이라는 내용이 있다. 1859년(철종 10)에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로 간행된 『국어(國語)』의 권말(卷末)에 있는 「주자사실(鑄字事實)」의 기록에 의하면 1794년(정조 18)에 내각(內閣)에 수장되었던 동활자(銅活字)들을 창경궁의 옛 홍문관 건물 안에 옮기고 이곳을 주자소라고 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는 창경궁의 고문관에다 주자소를 다시 설치하고 내각이 그것을 주관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고문관은 원래 창경궁에 설치되었던 옛 홍문관이었으나, 1794년(정조 18)에 내각에 수장되었던 동활자들을 창경궁의 고문관으로 옮기고, 여기에 주자소를 다시 설치하고 내각이 활자의 주조(鑄造)와 인쇄출판의 일을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문관은 내각, 즉 규장각(奎章閣)의 직원(直院)인 이문원(摛文院)에 소속되어 있었고, 어정서(御定書)를 인쇄출판 하는 데 있어 주로 교정(校訂)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음을 다음의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98년(정조 22) 7월 22일의『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기사를 보면, “여러 문신들에게 명하여 이문원의 고문관에 모여서『두육분운(杜陸分韻)』의 교정의 일을 분담케 하고 정리자(整理字)로 간행한 뒤 신하들에게 반사(頒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798년에 정리자로 간행된 『두율분운(杜律分韻)』의 권수제(卷首題)의 하단에 ‘고문관 봉교휘편(考文館 奉敎彙編)’이라 하여 고문관에서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는 기록과, 권말(卷末)의 간행 기록에서 “시문(詩文)에 뛰어난 신하들을 이문원의 고문관, 즉 창경궁 홍문관에 모아 교정을 분담케 하고 운(韻)에 따라 분류하게 하여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문관에는 책판도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의 기록을 보면, “오래 전부터 주자소에 있던 각종의 종이와 고문관에 소재된 재작판(梓作板)의 수효를 하나로 정리하여 도록(都錄)에 옮겨 적는다”는 내용을 통해서 그러한 대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국어(國語)』
『동궐도(東闕圖)』
『두율분운(杜律分韻)』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
『한경지략(漢京誌略)』
『홍재전서(弘齋全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