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인해 없어진 서적들 중에 긴요한 서적과 우리나라 사집(史集)을 제때에 간행하여 후대에 전해주기 위하여 1610년(광해군 2) 11월 22일에 교서관(校書館)을 각사(各司)의 다른 업무에서 침해받지 않고 서적의 간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임시 서적인출 관청이다.
부득이 긴요한 서적을 간행하는 동안만 교서관을 서적교인도감(書籍校印都監)이라 칭하였으며, 출판의 기한을 정해놓고 집중 감독하여 서적을 간행함으로써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자 하였다.
교인도감(校印都監)의 조직은 교서관의 두 제조(提調)를 당상(堂上)으로 삼고, 도청(都廳)에 겸교리(兼校理) 두 사람을 두었으며, 낭청(郎廳)에 교서관 관원 세 사람을 임명하였으며, 각 부문별 관서에서 창준인(唱準人) 이하의 장인들을 이속(移屬)시켜 조직되었다.
교인도감에서 인출한 책들은『국조보감(國朝寶鑑)』,『고려사(高麗史)』,『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여지승람(輿地勝覽)』,『춘추(春秋)』,『동문선(東文選)』등이다.
초기의 교인도감은 서적을 인출하는 업무만 하였으나, 1616년(광해군 8) 8월 21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를 보면, 주자(鑄字)를 만들기 위해 별도로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면 교인도감의 원역(員役)과 공장(工匠)을 나누어 보내야 하므로 효율성이 없을 뿐 아니라 낭비가 되므로 주자를 만드는 일까지도 교인도감에서 담당하도록 한 내용을 통해서 주자도감의 업무까지 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