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8년(중종 33) 김정국(1485∼1541)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전라도 도사(都事) 김회백(金晦伯)에게서 ‘금성에 예전부터 전해오던 활자가 있으나 부족하거나 이지러진 활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를 보충하여 활자를 추가로 만들게 하였는데, 이 활자의 명칭을 나주목(羅州牧)의 옛 칭호를 따서 ‘금성자(錦城字)’라 한다.
김정국은 금성자를 사용하여 자신이 편찬한『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400부를 인출하였으며, 그 인본의 완질이 1993년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인본의 글자를 조사하여 보면, 새김이 정교한 것은 종래부터 있던 활자이고 새김이 거친 것은 새로 보충한 글자로 추정된다.
나주 지역에서의 이러한 활자 제작과 출판 전통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나주자 제작으로 이어졌다. 다만 나주자의 글자체는 을해자계(乙亥字系)를 닮게 쓴 필서체이고, 금성자는 갑인자(甲寅字) 계열의 필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이 금성자로 인출된 다른 서적으로는 명종·선조 초 사이(1546∼1573)에 찍은 것으로『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에서는 유희춘(柳希春)이 지은 『속몽구분주(續蒙求分註)』를 금성자본으로 들고 있다.
『성리대전서절요』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필독서인『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의 많은 내용을 압축시켜 초학자들의 이해를 도왔다는 점에서 실용적 가치가 높다. 또한 편자가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으로 활자를 만들어 직접 간행·보급시켰다는 점과 그것이 임진왜란 이전의 지방 관서의 목활자본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