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당시 월성군에서 농경지 정리작업을 진행하던 중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이듬해인 1978년에 국립경주박물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기와가마터 20여 기가 확인되었다. 이후 2004∼2005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현,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에서 기와가마터 2기, 폐기장 2기 등을 추가로 조사하였다.
금장리 기와가마터는 경주시 현곡면에서 영천시로 이어지는 국도 북서편에 조성된 평지에 입지한다. 전체 유적의 범위는 동서 410m, 남북 450m이다. 발굴조사는 북서-남동 350m, 북동-남서 150m의 범위에 대해 A · B · C 3개 지구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기와가마터 20여 기는 전부 B · C지구에 위치하는데, 기와가마터 이외에는 모두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이 유적은 금장 3리의 넓은 들녘에 위치하고 있는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터로서 농지정리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고 바닥과 회구부(灰丘部)가 남아 있다. 기와가마터에는 기와 · 벽돌류[瓦塼類]와 이채벼루[二彩陶硯]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암 · 수막새와 도깨비얼굴기와[鬼面瓦]의 거푸집[陶製瓦范]이 주목된다. 암 · 수막새의 거푸집에는 각각 연꽃무늬[蓮花文], 당초무늬[唐草文], 구슬무늬[珠文]등이 음각되어 있고, 그 바깥쪽에는 한 단이 낮아져 편평한 면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의 제1호 기와가마터에서 출토된 “재성(在城)”이라는 명문이 적힌 암키와는 월성(月城)에서 발견된 기와와 동일한 것이다.
금장리 기와가마터는 다양한 기와 거푸집이 가마터에서 실제로 발견된 최초의 사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가마터 유적은 대규모 가마단지로서 8세기 이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하는 10세기 전반까지 신라의 왕궁과 경주 일원에 조영된 사원에 많은 기와와 벽돌을 생산하여 공급한 대표적인 관요(官窯)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