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왕경 관련 건물터.
개설
내용
이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에 처음으로 인간의 활동이 시작된 점이 포착되었으나 초기국가시대에는 별다른 공간 활용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시대(6세기 중반∼7세기 전반)에는 당시 거주인들에 의해 형성된 각종 구덩들이 남아 있으나 정형화된 건물터나 집터 관련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유적의 중심연대인 통일신라시대에는 왕경의 확장과 함께 방리제(坊里制)에 기초한 도시계획이 영향을 미치게 되어 도로와 함께 건물지, 우물, 배수구 등이 설치되었다. 이 중 동서도로에 설치되었던 배수구의 변화는 당시인들의 치수(治水)에 따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대체로 도로 내부에 자연배수를 하거나 중앙부의 배수구를 통해 오폐수를 처리하다가 9세기 중반 이후 배수구의 확충 필요성에 따라 너비가 넓은 석축시설이 부가된 옆도랑〔側溝〕을 마련하였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옆도랑의 변화가 관찰되는데, 옆도랑이 점차 협소해지다 고려∼조선시대에 폐기된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멸망과 함께 집수시설과 관련된 장방형석군 외에는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시대(16세기∼17세기 말경)에 들어 경주읍성과 관련되는 동서도로가 주요 도로로서 유지되면서 각종 건물지와 도랑, 구덩 등이 조성되어 공간활용이 증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경주 북문로 왕경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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