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북문로 왕경 유적 ( )

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왕경 관련 건물터.
이칭
이칭
북문로유적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왕경 관련 건물터.
개설

경주시의 도시개발사업에 따라 2000년 10월 24일부터 2001년 8월 11일까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왕경과 관련된 유구와 건물터가 이 유적의 중심을 이루며 청동기∼조선시대까지의 생활유구가 일부 조사되었다.

내용

경주 북문로 왕경유적은 경주분지의 충적평야에 입지하는 경주 읍성의 북동편 모서리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조선시대의 구덩〔竪穴〕342기, 통일신라시대 도로 2기, 석조유구(石造遺構) 4기, 통일신라∼조선시대의 건물터 8동, 우물 10기, 매납유구(埋納遺構) 12기, 고려∼조선시대의 장방형석군(長方形石群) 1기, 조선시대의 가마〔窯〕4기 등 모두 38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에 처음으로 인간의 활동이 시작된 점이 포착되었으나 초기국가시대에는 별다른 공간 활용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시대(6세기 중반∼7세기 전반)에는 당시 거주인들에 의해 형성된 각종 구덩들이 남아 있으나 정형화된 건물터나 집터 관련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유적의 중심연대인 통일신라시대에는 왕경의 확장과 함께 방리제(坊里制)에 기초한 도시계획이 영향을 미치게 되어 도로와 함께 건물지, 우물, 배수구 등이 설치되었다. 이 중 동서도로에 설치되었던 배수구의 변화는 당시인들의 치수(治水)에 따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대체로 도로 내부에 자연배수를 하거나 중앙부의 배수구를 통해 오폐수를 처리하다가 9세기 중반 이후 배수구의 확충 필요성에 따라 너비가 넓은 석축시설이 부가된 옆도랑〔側溝〕을 마련하였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옆도랑의 변화가 관찰되는데, 옆도랑이 점차 협소해지다 고려∼조선시대에 폐기된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멸망과 함께 집수시설과 관련된 장방형석군 외에는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시대(16세기∼17세기 말경)에 들어 경주읍성과 관련되는 동서도로가 주요 도로로서 유지되면서 각종 건물지와 도랑, 구덩 등이 조성되어 공간활용이 증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경주 북문로 왕경유적의 발굴조사는 통일신라 왕경의 구조와 왕경 내부 건물 시설에 관한 연구를 진척,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고대 신라인의 생활상을 복원하고 그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거생활 변천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경주 북문로 왕경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3)
집필자
배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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