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봉길리유적은 31번 국도 건설에 따라 1997년 울산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맨 처음 시작하였다. 이후 신월성 원전사업에 따라 2002∼2003년에 걸쳐 영남문화재연구원과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현,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월성 원자력홍보관 신축을 위해 2003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집터 20동과 도랑[溝] 2기가 조사되었다. 아울러 신라시대 덧널무덤[木槨墓] 29기, 돌덧널무덤[石槨墓] 148기, 돌덧널독[石槨甕棺] 1기, 독[甕棺] 3기, 구덩[竪穴] 3기, 돌열유구[石列遺構] 1기, 도랑유구[溝狀遺構] 1기와 통일신라시대 담장 1기, 도랑유구 1기, 가마[窯] 2기, 구덩 7기, 기둥구멍이 조사되었다. 이 외에, 조선시대 독무덤[甕棺墓] 2기, 움무덤[土壙墓] 13기 등 다종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봉길리유적은 지형적으로 경주 분지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토함산-조항산-삼태봉을 잇는 남북방향 산지[東大山脈]의 동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양북면 일대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 수계의 남쪽에 위치한다. 조항산의 동편에 위치하는 우산에서 동쪽으로 여러 갈래의 구릉 중 북편 구릉의 남사면에 위치한다. 해안으로부터 약 200m 정도 거리이며 집터는 구릉의 정상부에서부터 사면을 따라 고르게 분포한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20동이 조사되었는데, 평면형태는 구 지형의 훼손이 심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나 규모와 기둥구멍을 통해 추정해보면 네모모양[方形]과 긴네모모양[長方形]으로 구분된다. 집터의 크기는 길이 320∼710㎝, 너비 335∼367㎝, 깊이 5∼70㎝, 면적 10.5∼33.2㎡이다. 집터내 기둥구멍의 배치는 4주식, 6주식, 8주식으로 구분된다. 그 외 시설로는 벽도랑[壁溝], 화덕자리[爐址], 외부로 연장되는 배수구 등이 조사되었다.
벽도랑은 구릉의 경사면 높은 쪽을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며 평면 형태는 ‘ㅁ’자, ‘ㄱ’자, ‘ㄷ’자, ‘l’자형으로 나뉜다. 벽도랑의 너비 20∼30㎝, 깊이 5∼15㎝, 단면형태 ‘U’자상이며 벽도랑 내에서 벽기둥[壁柱]이 설치된 경우도 있다.
화덕자리는 평면형태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덩을 파서 불을 지핀 구조로서 단벽쪽에 치우쳐 위치한다. 바닥면은 별다른 처리없이 굴착면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몇몇 집터는 불다짐하여 바닥면을 단단하게 하였다. 또한 집터의 대부분은 자연폐기되었으나 몇 동은 화재로 인해 폐기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 가로금무늬토기[橫線文土器], 간돌검[磨製石劍], 돌도끼[石斧], 돌창[石槍], 돌화살촉[三角灣入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집터 내에서 출토된 목탄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분석 결과, 서기전 870∼430년까지 산출되어 청동기시대 후기로 편년이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신라시대 무덤 중 덧널무덤은 돌덧널무덤에 의해 파괴된 양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덧널무덤의 대다수는 돌덧널무덤보다는 빠른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덧널무덤의 일부는 돌덧널무덤과 동일한 시기의 것도 존재한다. 덧널무덤의 평면형태는 모두 긴네모모양이며 바닥은 굴착면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잔자갈을 깔아 마련하였는데, 이는 돌덧널무덤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무덤은 2개의 독을 이용한 이음식[合口式]이다. 이 중 돌덧널독[石槨甕棺]은 다른 독무덤과 달리 독을 매납하는 공간을 판석조(板石造)의 깬돌[割石]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다소 특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분군에서는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접시[蓋杯], 손잡이달린잔[把手附杯], 항아리[壺], 독[甕] 등 총 1,15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볼 때, 무덤들은 4세기 중엽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6세기 초까지 장기간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봉길리유적은 동해안에 인접한 지역의 대규모 청동기시대 마을과 신라시대의 덧널무덤 등이 복합적으로 조영된 유적으로서 각 시대별 구릉의 공간활용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