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 묵재 이문건이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한글 묘비이다. 이 묘비는 이문건이 부친인 이윤탁의 묘를 모친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세운 것이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또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경고문이 새겨져 있다. 특히 비석 왼쪽 면의 한글 비문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조선 500년 동안 최초의 것이다. 이 영비는 16세기에 순수 국문으로만 쓰여 중세 국어와 서체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인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한글 묘비이다. 이윤탁은 이문건이 7세 때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묘는 지금의 태릉(泰陵) 자리에 있었으나, 훗날 그 부지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역으로 수용되게 되었다. 1536년 정월에 모친 신씨가 운명하자 이문건은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면서 부친을 합장한 것이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 이 경계문은 비와 묘역이 사람들에 의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새긴 것으로, 합장묘를 세우고 묘비를 만들게 된 경위는 이문건의 『묵재일기(黙齋日記)』 중 1535년 11월 1일부터 1537년 6월 3일까지의 기록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이 비석의 왼쪽 면에 새겨진 한글 경고문은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묘비의 왼쪽에는 한자 정자로 ‘영비(靈碑)’라고 쓴 큰 글자 밑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한글 비문이 두 줄로 새겨져있다. “녕ᄒᆞᆫ 비라 거운 사ᄅᆞᄆᆞᆫ ᄌᆡ화ᄅᆞᆯ 니브리라/ 이ᄂᆞᆫ 글모ᄅᆞᄂᆞᆫ 사ᄅᆞᆷᄃᆞ려 알위노라” 이는 “신령한 비석이므로 훼손하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알리노라.”라는 뜻이다. 묘비의 오른쪽에도 한자로 ‘불인갈(不忍碣)’이라고 새긴 큰 글자 밑에 두 줄로 비슷한 내용의 경고문이 적혀 있다. “爲父母立此 誰無父母 何忍毁之 石不忍犯 則墓不忍凌 明矣 萬世之下可知 免夫(위부모입차 수무부모 하인훼지 석불인범 칙묘불인능 명의 만세지하가지 면부)” 이는 “부모를 위하여 이것을 세우는 것이니, 누구인들 부모가 없겠으며 어찌 차마 이것을 훼손시키겠는가. 비석을 차마 범하지 못한다면 묘도 차마 능멸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만세의 후인들은 이를 알아야 하니 힘쓸지어다.”라는 뜻이다.
이 한글 고비(古碑)는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씌어있다. 한글 영비는 조선 전기의 유일한 한글 비석으로 중세국어와 서체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했지만 조선시대에 한글로 비석을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한글 비석은 현재 3점이 남아 있으며, 한글 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2점은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이처럼 한글 영비는 한글로 쓴 최초의 비문이라는 의미 외에도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건립내력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는 점에서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비석에 쓰인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한글영비’는 우리나라의 묘비 중 한글로 쓴 최초의 비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16세기 전반기에 순수 국문으로만 쓴 한글 고비라는 점에서 당시의 국어생활사와 한글서체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