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나한도는 석가모니의 제자 중 16명의 나한을 그린 그림이다. 이들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부처에게 위임받은 제자들이다. 부처의 수많은 제자들 중 ‘16명’으로 십육나한을 구성하게 된 경위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
십육나한 신앙은 당나라 현장(玄獎)이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를 번역한 7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여 당말 오대, 송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세신앙(末世信仰)과 함께 8세기 후반부터 십육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그 중 조선 후기 나한도의 대부분이 십육나한도이다.
조선 후기 십육나한도는 대체로 나한을 모시는 전각인 응진전이나 나한전에 봉안되었으며, 사찰 내 나한전이 없는 경우는 대웅전이나 미타전, 칠성각이나 삼성각 등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보통 내부 중앙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홀수의 나한도는 향우측, 짝수의 나한도는 향좌측에 봉안된다.
그림의 형식은 1폭에 나한을 1명씩 그리기도 하고 2명 또는 3명, 4명, 8명의 나한을 1폭에 그리기도 하는 등 다양하다. 나한은 염주를 비롯하여 각종 꽃 · 지팡이 · 그릇 · 동물 · 경전 · 금강저 · 과일 등을 들거나, 등을 긁기도 하고 경전을 읽고 참선(參禪)하는 등 자유로운 모습으로 표현된다.
여수 흥국사 「십육나한도」(1723년)는 가장 이른 작품으로 18세기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화승인 의겸(義謙)과 제자들이 그려 응진당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좌우 3폭씩 총 6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송광사 「십육나한도」(1725)를 비롯한 18, 19세기 십육나한도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19세기 후반 서울 · 경기 지역에서는 남양주 흥국사 「십육나한도」(1892년)와 봉은사 영산전 「십육나한도」(1895년)처럼 화면을 3∼4등분하여 한 면에 한 나한씩 그린 형식과 불암사 「십육나한도」(1897년), 수국사 「십육나한도」(1907년)처럼 화면의 중앙에 석가삼존을 그리고 그 주위를 3당 16칸으로 구획하여 십육나한을 그린 형식이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