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제작된 종이로 만든 갑옷으로 질긴 한지를 여러 겹 접어서 미늘[札]을 만들고, 이것들을 녹비(鹿皮)로 얽어 짜서 검은 칠을 하여 만들었다. 수은갑(水銀甲)ㆍ유엽갑(柳葉甲)ㆍ피갑(皮甲)ㆍ쇄자갑(鏁子甲)ㆍ경번갑(鏡幡甲)과 아울러 군용(軍用)에 쓰였다.
지갑은 조선 초기부터 제작하여 사용되었는데, 태종때에는 지갑이 흰색이기 때문에 위생상으로 보관하기가 좋지 않고 제작상의 난점도 있기 때문에 청색으로 바꿀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종이로 갑옷을 만들어 사용하는 이유를 성호 이익은 “당나라 서유공(徐有功)의 5대손 대중(大中)이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가 되어 정군(征軍)을 배치한 것이 1,000명이나 되었고, 종이로 개(鎧)를 만들었는데 굳센 화살도 뚫지 못하였다. 또 남당(南唐) 이방(李方)이 종이로 갑옷을 만들어 향리의 의사(義士)를 모아서 호를 백갑군(白甲軍)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양성제(楊誠齊)가 말한 ‘회서(淮西) 백성이 종이로 갑옷을 만들었지만 주(周)의 군사가 여러번 패한 바 되었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개(鎧)는 갑옷인데, 『주례(周禮)』 사갑(司甲)의 주에 ‘예전에는 가죽으로 만들어 갑(甲)이라 했고, 지금은 쇠로 만들어 개(鎧)라고 한다’ 하였다. 대개 종이는 부드럽고 얇은 물건인데 화살이 금과 가죽은 뚫으면서 종이는 뚫지 못하니 무엇 때문일까? 무릇 총탄도 강한 것은 뚫을 수 있으나 부드러운 것은 뚫지 못한다. 그리하여 총탄이 장막에 둘러진 휘장에 이르면 그 비폭이 흔들리므로 총탄이 그냥 떨어져 버린다. 만약 총탄이 딱딱한 물건에 맞는다면 어찌 뚫고 나가지 못하겠는가? 그 이치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얇은 종이라도 수십겹으로 갑옷을 만든다면 한겹을 지나면 또 한겹이 있으므로 이렇게 수십겹을 지나는 동안 화살은 힘이 다하고 말 것이다. 만약 굳게 붙여 하나로 된다면 어찌 금과 가죽에 미치지 못할 뿐이겠는가?”(『성호사설』) 라고 종이로 제작한 갑옷이 견고한 방호효과를 거둔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제작된 지갑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작은 조각을 만들고, 이를 사슴가죽이나 실로 엮어 만든 지찰갑(紙札甲), 종이와 천으로 조끼 모양을 만들어 가슴과 등을 방호할 수 있도록 한 지포엄심갑(紙布掩心甲), 종이를 10~15선 두께로 누벼서 만든 지제배갑(紙制背甲) 등이 그것이다.
지포엄심갑은 태조때 기록에 등장한 이후 연산군때에는 피갑과 함께 널리 사용되던 대표적인 갑옷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나라의 지갑이 도입되어 활용되었다. 이후 광해군때에는 훈련도감의 포수 5천명이 엄심을 착용했는데, 이 엄심은 명나라에서 전래된 지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 전해오는 지갑 유물이 없다.
『국조오례의서례』에 나오는 지갑은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작은 조각을 만들고, 이를 사슴가죽이나 실로 엮어 만든 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찰갑과 동일하다.
제조방법은 미늘[札]은 종이를 접어서 만들고, 지갑(紙甲)은 사슴가죽을 엮어서 흑칠을 하여 제조하였으며, 후에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은 형태의 갑적고리(甲赤古里)는 두터운 종이를 소금물에 너댓번 담그는 과정을 거쳐서 제조하였다.
지갑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재료와 제작방법은 한 달에 종이 갑옷 열벌씩 제조하여 1年에 1백 20벌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재료로 본뜨는 체지(體紙) 1천 20근, 이면(裡面)에 쓰이는 표지(表紙)가 1백 20권, 엮는데 쓰이는 면사(綿絲)가 1백 20근, 잇는데[聯] 쓰이는 황색 면사가 1백 80근, 송지(松脂)가 36두, 全漆이 7두 2승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종이갑옷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각종 종이는 조선 전기의 경우 각도에 공물로 분정(分定)되어 상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