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1938년, 농촌계몽을 위해 조직된 농우회를 일제가 독립운동을 도모한다고 의심하며 그 참여자들을 예비 검속 차원에서 혐의를 조작하고 탄압한 사건.
발단
역사적 배경, 경과, 결과
귀국한 유재기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농과강습소에 입학하여 전문 농업 지식을 습득하며 농사 훈련을 받는 한편,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로 나섰다. 이때 그는 조만식과 배민수를 만나서 이들이 주도하던 ‘기독교농촌연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33년에 연구회의 배민수 목사가 장로교회 농촌부 총무를 맡자, 유재기도 교단 총회의 농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예수의 주의대로 살아가는 기독교 농촌 공동체’, 즉 ‘예수촌 건설’을 장로교회 농촌운동의 목표로 삼고 그 실천 방법으로 협동조합운동의 필요성을 제시했다(1933년 『조선일보』에 19회 기고). 실제로 그가 협동조합운동을 실천한 결과, 대구와 경상북도 의성에서 교회를 거점으로 하여 일반 농민들이 서로 도와 자립하는 농촌 공동체를 수립할 만큼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4년경부터 교계 안에서 농촌운동 지도자들의 반목과 대립이 심화되었고, 장로교회 총회 안에서 농촌운동에 대한 목회자들의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요시찰 인물과 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장로교회의 농촌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장로교회 총회도 농촌부를 폐지하기로 결의하면서 농촌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 등 정치적 사건으로 기독교계의 농촌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6월 8일 대구 침산교회에 시무하고 있던 유재기는 가택 수사와 기타 서류를 압수당하며 의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이전 5월 28일 의성에서는 이미 교회가 수색을 당하고 청년 회장 이인재를 비롯해 박인환, 정해룡, 구학수, 박인수, 백치문, 이동수, 천성훈 등의 면려청년회 임원들과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이 체포, 구금되었다. 일제는 이들이 조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협동조합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농민 각 계층에 투쟁 의식을 주입했다고 보았다. 이 사건에는 주기철 · 이유택 · 송영길 등 신사참배 반대자들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결국 유재기는 193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고, 항소 후 5월에는 역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이는 이 사건이 단순히 농촌운동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일제 말기 전쟁의 국면에서 일제에 저항적인 일체의 반일 세력에 대해 사전에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김병희 편, 『세대를 뛰어 넘는 경계인-허심 유재기 목사 저작집-』 (예영커뮤니케이션, 2011)*/
- 임희국, 『선비 목회자 이원영 연구』 (기독교문사, 2001)
- 주태익, 『이 목숨 다 바쳐서 한국의 그룬트비히 허심 유재기전』 (선경출판사, 1977)
- 한규무, 『일제하 한국기독교농촌운동 1925-193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논문
- 김권정, 「1920~1930년대 유재기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회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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