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우회는 1930년대 평양 장로회신학교(장로교회 교단의 직영신학교) 학생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농촌계몽을 위해 만든 농촌연구회였는데, 이 농우회를 중심으로 전국 여러 지역의 농촌 기독교 청년들이 야학을 열었고 또 농촌 경제를 살리고자 농사개량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것은 1929년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의 농촌운동(농촌인구 감소에 따른 교인 감소를 타개, 농촌교회 재정위기와 직결된 농촌경제 살리기)과 병행했다. 농우회사건은 1938년 6월 경상북도 의성의 경찰이 농우회를 통해 기독교 청년운동을 하고 있던 유재기 목사를 비롯하여 -반일(反日)사상을 가졌다고 의심하는- 여러 교회 지도자를 체포한 사건이다.
유재기(劉載寄, 1905-1949)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유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 시절 겪은 3·1만세운동(1919)의 현장을 통해 민족의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인이 된 그는 대구로 유학하여 교남학교에서 공부하며 야학활동을 했다. 그는, 선교사를 도와 평신도 교역자인 조사(助事)로 일했고, 기독교인으로서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말미암아 생존의 위기에 처한 농촌의 현실을 고민하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서 기독교사회사상을 탐구하던 그는 기독교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귀국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농과강습소에 입학하여 전문 농업지식을 습득하며 농사훈련을 받았다. 그는 또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로 나섰다. 이때 그는 조만식과 배민수를 만나서 이들이 주도하는 공부모임에 참석했고, 1929년 이 모임을 기초로 결성된 ‘기독교농촌연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연구회의 좌장인 배민수 목사가 1933년 장로교회 농촌부의 총무를 맡게 되자, 기독교농촌연구회 회원들이 교단총회의 농촌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여기에 유재기도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촌 건설’을 장로교회 농촌운동의 목표로 삼고서 협동조합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933년 <조선일보>에 19회 기고). 실제로 그가 협동조합운동을 실천한 결과, 대구와 경상북도(의성)에서 교회를 거점으로 하여 농민들이 서로 도와서 자립하는 농촌공동체를 수립할 만큼 결실이 맺혔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농촌운동은 대략 1934년부터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쳤다. 교계 안에서 농촌운동 지도자들의 반목과 대립, 장로교회 총회 안에서 농촌운동에 대한 목회자들의 찬반논쟁, 게다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요시찰 인물과 단체에게 탄압을 가했다. 이때 장로교회의 총회는 농촌부를 폐지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여러 해 동안 전개해오던 농촌운동을 사실상 접게 되었다. 1938년 2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청년연합회(YMCA) 간부들이 검거되었고, 일제는 YMCA의 흥업구락부운동과 농촌사업이 조선의 독립을 표방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6월 8일 유재기(대구 침산교회 담임목사)는 소위 농우회사건으로 말미암아 박학전과 함께 체포되었다. 의성경찰서로 압송된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 농우회 회원 및 이 단체와 관련된 자들도 체포되어 여러 유치장으로(청송, 안동 등) 분산 투옥되었다. 또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회자들도(주기철 · 이유택 · 송영길 등) 검거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유재기는 193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 후 5월에는 역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1940년 초반에 석방되었다.
농우회사건의 주인공 유재기 목사는 농우회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운동을 펼쳤는데, 그런데 일제가 농우회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고 의심하며 이 단체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