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월 8일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태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용손(龍孫)이다. 아버지는 우정길(禹庭吉)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일생 동안 혼자 살면서 외아들을 보살폈다.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명신소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해 1917년에 졸업하였고, 191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21년에 졸업하였다. 1920년 3월 숭실전문학교 학생전도대에 편성되어 박형룡 등 16명과 함께 남한 일대를 1개월에 걸쳐 전도하였는데, 4월 초순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교회에서 전도 강연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때 박형룡은 재판을 받고, 10개월의 형을 받았다. 우호익은 6월에 다시 전도대에 편입되어 평안북도와 함경도, 북간도 지방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1921∽1923년 전라남도 목포 영흥중학교 교감으로 시무했다. 1923년 4월 일본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고, 1927년 3월 졸업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1928년 7월 평양 이일영(李一永) 목사의 4녀 이마리아와 결혼했다. 1933년 문과 과장이 되었고, 1932∽33년 어간에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중고등부 주일학교를 개설해 성경공부를 전담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 문화와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진단학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의 숭실학교 · 숭의여학교 · 숭실전문학교[3崇]를 비롯한 전국의 장로교 계통 미션 스쿨들이 폐교될 위기에 처했을 때, 숭전존속기성회를 조직했다. 그는 회장직을 맡으면서 숭실전문학교 농학과장 이훈구와 함께 숭실전문학교 인수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학교는 폐교되었다. 1938년 5월1940년 8월 15일 조선일보 평남 지사장으로 언론활동에 참여하였고, 19411946년 재단법인 평양 인정도서관 관장으로 근무하였다.
해방이 되자 숭실대학 재건운동을 시작하였지만, 평양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1948년 월남한 후, 9월에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제주도로 피난 갔고, 미국 장로회선교부의 원조를 받아 제주읍내 오현중고등학교의 분교 명의로 제주읍 피난민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53년 10월 10일 숭실대학 개교기념일에 동문들을 모아 재건을 발의하였고, 1954년 4월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후 숭실대학 사학과 교수 및 부학장으로 재직하였고, 1958년 2월 26일 숭전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63년 2월 24일 숭전대학을 은퇴하고, 영락교회 다비다모자원 이사장 및 마포삼열박사기념사업회 감사로 봉직했다. 1977년 숭실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83년 10월 19일 마포구 성산동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