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숭실전문학교 학생전도대에 편성되어 박형룡 등 16명과 함께 남한 일대를 1개월에 걸쳐 전도하였는데, 4월 초순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교회에서 전도 강연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때 박형룡은 재판을 받고, 10개월의 형을 받았다. 우호익은 같은 해 6월에 전도대에 다시 편입되어 평안북도와 함경도, 북간도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1923년 4월 한국사 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고, 1927년 3월 졸업을 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민족의식을 갖고 역사를 공부하던 중 우호익이 주목한 것은 무궁화였다. 일제가 한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로 무궁화를 탄압하는 상황에서, 그는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숭실전문학교 교수 부임 직후 발표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 문화와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진단학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주2 강요로 전국의 장로교 계통 미션 주3들이 폐교될 위기에 처했을 때, 숭전존속기성회를 조직했다. 회장직을 맡으면서 숭실전문학교 농학과장 이훈구와 함께 숭실전문학교 인수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학교는 폐교되었다.
1938년 5월1940년 8월 15일까지는 조선일보 평남 지사장으로 언론활동에 참여하였고, 19411946년에는 재단법인 평양인정도서관관장으로 근무하였다. 숭실대학 재건운동을 시작하였지만 평양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탄압을 받자 1948년 월남한 후 같은 해 9월에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1953년 10월 10일에 숭실대학 개교기념일에 동문들을 모아 숭실대학 재건을 발의하였고, 1954년 4월에는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숭실대학 사학과 교수 및 부학장으로 재직하였고, 1958년 2월 26일 숭전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63년 2월 24일에 숭전대학을 은퇴한 뒤 1977년 숭실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10월 19일 마포구 성산동에서 별세하였다.
우호익은 무궁화를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처음 발표한 논문은 1927년 잡지 『동광』에 3회에 걸쳐 연재한 「무궁화고(無窮花考)」였다. 1928년에는 잡지 『청년』에 연구의 결론 성격으로 「무궁화 예찬(無窮花 禮讚)」 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세상의 많은 꽃 가운데 무궁화가 어떻게 한국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문헌들을 근거로 역사적으로 고찰했다는 점에서 무궁화 연구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무궁화의 이칭(異稱)’, ‘문학에 나타난 무궁화’, ‘의학상에 나타난 무궁화’, ‘식물학상에 나타난 무궁화’,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란 주제로 아주 상세하게 검토하였다. 무궁화 연구는 내용상 풍부하고 다양하며 정확한 문헌 고증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이후 무궁화 연구자의 필독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