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李勳求)는 1896년 충청남도 서천 출생이다. 조부 이면직(李冕稙)이 설립하고 부친 이학규(李鶴珪)가 운영하던 가산학교를 다니면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1917년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1921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수료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귀국 후 기독교 계통의 공주영명학교(公州永明學校)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926년에는 미국 감리교청년회 교육부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캔자스주립농과대학에 유학하여 1년 만에 식민지 치하 조선의 토지 소유 관계를 다룬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그 요지를 1927년 8월 중순부터 10회에 걸쳐 『 조선일보』에 「소작문제의 경제학적 일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1927년 가을에는 위스콘신대학 농업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미국 농무성 토지 정책 주무자인 그레이(L. C. Gray)의 주선으로 농무성 농업경제국 촉탁으로 잠시 근무한 후, 1930년 중국 난징〔南京〕에 가서 미션스쿨인 진링대학〔金陵大學〕 교수가 되어 농업경제학을 가르쳤다. 이듬해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장 매쿤(George S. McCune, 한국명 윤산온)의 권유로 1931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인가를 받아 신성된 농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과과장을 지냈다.
1931년부터 1932년에 걸쳐 미국 록펠러재단이 후원하는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와 미국지리학회(American Geographical Society)로부터 의뢰받은 연구를 수행하면서 미국 및 조선학계에 농업 문제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932년 장로교 농촌운동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면서 장로회 총회 농촌부의 기관지 『 농민생활(農民生活)』의 편집에 참여하고, 농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은 물론 농작물의 병충해 예방, 가축 사육법, 과수 재배법 등 농업에 관한 모든 분야를 다루었다. 대중 활동도 활발히 하여 농사 강습회와 수양회 등 농촌 순회강연에도 농업 전문가로 참여하였다. 1933년 7월 개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내에 고등농사학원장을 맡아 사업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1936년부터는 이종만(李鍾萬)의 자본에 기반을 둔 대동사업체의 창립과 운영 과정에도 참여하여 대동농촌사(大同農村社)의 전무이사를 맡아 자작농 창정 사업과 집단 농촌 건설을 추진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청 농무부장으로 입각하여 재직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농지개혁법」 입법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단국대학장과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대 말엽 정계에 복귀하여 민족주의 민주사회당 부통령 후보, 사회대중당 소속 제5대 국회 참의원, 통일사회당 중앙당 정치위원을 거쳐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인 등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1960년 5‧16군사쿠데타 직후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같은 해 6월 13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여 농업경제학을 연구하였다. 만주 개척 지역의 조선 이주민 실태를 연구하여 조선인 이민의 원인이 경제적 곤궁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주 후에도 궁핍한 생활에 시달린다는 점을 규명하여 1932년 『만주(滿洲)와 조선인(朝鮮人)』을 간행하였다. 또 식민지 조선의 토지 이용 실태 조사 연구를 통해 1935년에 『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을 간행하여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부각하는 기존 조선총독부의 자료를 논박하고, 피폐해진 조선 농촌의 실상을 부각하였다. 이 외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여러 매체에 식민지 조선 농촌의 개선 방향을 적극적으로 기고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