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년(희종 7) 장군으로서 무신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의 명에 따라 폐위된 희종을 강화도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희종이 유배당한 것은 내시낭중(內侍郎中) 왕준명(王濬明) 등으로 하여금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광유는 교동현에서 돌아와 최충헌에게 “전왕(前王)이 대단히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또 공급하는 물품도 부족해 단지 쌀 6석(石)만 남아 있다”고 보고하였다. 희종이 처한 딱한 현실을 목도하고서 처우개선을 주장하였으나 최충헌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16년(고종 3) 몽골군에게 쫓긴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대거 압록강을 넘어 침입해오자 조정에서는 적을 격퇴시키기 위해 3군(三軍)을 편제하여 북계(北界)로 나아가게 했다. 이때 장군 이광유는 연주(延州: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의 사자암(獅子岩)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