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낙산사 일원 ( )

양양 낙산사 일원
양양 낙산사 일원
인문지리
유적
국가유산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양양 낙산사 일원(襄陽 洛山寺 一圓)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08년 12월 18일 지정)
소재지
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일원 (전진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개설

낙산사는 양양읍에서 북쪽으로 약 7㎞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찰이다. 낙산의 정상부에서 남쪽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의 가장 평탄한 능선 위에 낙산사의 주요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낙산사 사찰의 주축은 낙산의 지세에 따라 북서쪽에서 남동을 향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과 서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낙산사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문헌으로는 만해 한용운이 지은 「낙산사 사적(落山寺事蹟)」을 비롯하여 다수의 기록이 있다. 이들 사료에 나타나는 내용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의 기록이다.

창건된 후 786년(원성왕 2)에 낙산사는 화재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범일국사가 858년(헌안왕 2)에 불전을 다시 짓고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봉안하였다. 10세기 중엽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사찰이 다시 소실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를 다시 중창하고 13세기 초에 이규보 등이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유물을 봉안했다. 그 후 1254년(고려, 고종 41)에 있었던 몽고군의 침입으로 낙산사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은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계속적인 화재로 사찰 건물이 소실되고 다시 중창된 절임을 확인할 수 있다.태조 이성계는 1399년(정종 원년)에 낙산사에서 능엄법회를 열었고, 1399년(태종 4)에 기청법회를 열었다. 이처럼 낙산사는 왕실의 주관으로 법회가 개최된 사찰이었다. 1467년(세조 13)에 세조 역시 낙산사에 헌향하고 사찰중건을 명하였으며, 1469년(예종 원년)에는 범종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산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래서 1631년(인조 9)에는 36명의 승려가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창하였으며, 1850년(철종 원년)에는 원통보전, 용선전, 어실각 등을 중수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사찰 전체가 또다시 소실되었다. 이후 1953년에 원통보전이 신축된 이후부터 1999년까지 7층 석탑이 중수되고 무설전, 무이당, 범종각, 심검당, 근행당 등의 전각이 건립되면서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그러나 2005년 4월 5일에 낙산사는 화재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은 낙산사의 건물은 물론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까지 소실되는 피해를 가져왔다. 2005년 이 화재로 인해 낙산사 동종은 지정 해제되었다.

2005년 산불 피해로 한국의 3대 관음도량의 하나인 낙산사가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폐사 위기를 맞게 되자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는 2005년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발굴에서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인화문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고려시대의 막새기와 및 고려청자, 그리고 조선백자와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낙산사의 유구한 역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문화재청은 원통보전, 무설전, 범종각, 고향실 등을 비롯하여 부속 건물인 근행당, 심검당, 취숙헌, 무이당 등 재건에 필요한 내용을 확인한 후,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요컨대 낙산사는 수 없이 많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축되거나 중건되었으며,최근 대형 산불의 피해를 입은 이후에도 주요 전각들을 다시 지어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구축해 오고 있다.

내용 및 특징

낙산사는 창건배경과 역사성 그리고 주변의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사적이다. 창건 당시 화엄종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의상대사가 이곳에 직접 와서 위치를 정해서 지은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리며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는 전국을 두루 순회하며 화엄사상을 펼치는 한편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등의 화엄 10찰을 창업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는 매우 위상이 높은 사찰이었기 때문에 외침이나 화재 등과 같은 대형 재해로 절집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그 때마다 즉시 중창하여 오늘날까지 사찰의 위용을 지켜오고 있다.

낙산사가 위치하고 있는 낙산의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있는데,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해안풍경을 이룬다. 무엇보다 해안의 단애(斷崖) 위에 의상대가 있다.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좌선하였다는 해안의 암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주변의 노송과 어우러진 정자의 모습은 동해의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더욱 빼어난 경치를 이루며, 의상대에서 형성되는 일출 경관 역시 잘 알려진 풍광이다.

의상대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닷가 절벽 위에 건립된 홍련암에 다다른다.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일명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홍련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입산할 때에 의상이 파란 새를 보고 쫓아 갔는데, 그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의상은 바위 위에 정좌하고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깊은 바다 속에서 붉은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이때 의상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기원하였는데 이후 만사가 모두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그 자리에 ‘홍련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의상대에서 홍련암에 이르는 해안구간은 자연풍광은 물론 동해일출의 명소로서 2007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문화재대관(사적)』(문화재청, 2010)
『문화재대관(천연기념물·명승)』(문화재청, 2009)
『삼국유사』(일연·김원중 역, 민음사, 2008)
낙산사(www.naksansa.or.kr)
국가유산청(www.khs.go.kr)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