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두 편으로 나뉘어 발표되었는데, 1929년 『신생(新生)』 4월호에 「시조의 현재와 장래(1)」가, 같은 해 『신생』 6월호에 「시조의 현재와 장래(완)」가 각각 게재되었다.
「시조의 현재와 장래(1)」에서는 당시 조선의 문예운동을 이끌었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시조를 인용하면서 비교ㆍ평가하고 있다. 이병기는 육당의 시조 「궁거워」가 “심적암시(心的暗示)”를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지적(理智的)”이라는 점, 「한강을 흘리저어」의 경우 조사의 사용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 「어느 날」의 경우 “의미가 통일되지 못”한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춘원의 시조 「보낸 뒤」에 대해서는, 초장에 나오는 “서창(西窓)을 열떨이니 금계봉(金鷄峰)이 달이로다”를 인용하면서 고유명사를 사용한 점을 높게 평가하였으며, 「눈」에 대해서도 “어젯밤 구진비가 새벽찬 눈이로다/한 아이 손벽치며 소곰 뿌렸다하니/한 아이 뛰어나오며 설당이라 하더라”라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어린애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이 시조를 지은 것이 볼만하고 용어라든가 풍격(風格)이 먼저 말한 「보낸 뒤」의 것보다 좀 더 다른 맛”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시조의 현재와 장래(완)」에서는 “시조도부흥(時調道復興)을 하자는 것보다도 시조신운동(時調新運動)을 하자”고 주창하였다. 그가 주창한 시조신운동의 방향은 다음의 4가지다. 첫째, 조선어의 미를 찾아 쓰자. 둘째, 사생법(寫生法)을 힘쓰자. 셋째, 신율격(新律格)을 지어내자. 넷째, 창법(唱法)을 고치자.
이 글은 1920∼30년대 한국문단을 풍미했던 ‘시조부흥운동’의 측면에서 주목되는 글이다. 1920년대 중반 우리 문단에 ‘시조부흥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이병기는 1927년 3월 『신민(新民)』에 발표한 「시조는 부흥(復興)할 것이냐?」라는 글을 통해, ‘부흥’으로서의 ‘복고적’인 시조운동이 아니라, 시조의 창작 방법이 새롭게 쇄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여 2년이 지난 무렵에 시조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 바로 「시조의 현재와 장래」인 것이다. 또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932년에 「시조는 혁신(革新)하자」는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함으로써 이병기는 시조 창작지침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조의 현재와 장래」는 당시 시조 운동의 방향을 바꾸는 데 일조한 평론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