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경남 김해 출생. 1939년 『문장』지에 단편소설을 추천받아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 『풍장』 등이 있다.
정진업은 1916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월초(月礁, 月艸). 1930년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34년에 졸업했다.
1936년 무렵 이광래가 이끄는 〈극예사〉와 〈황금좌〉 같은 연극단체에 들어 연극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5월 『문장』지에 단편소설 「카츄사에게」로 이태준의 추천을 받았다. 1940년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잠시 다녔으며, 통영 협성상업학원(현 통영제일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기도 했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마산 〈공락관〉에서 「강씨일가」를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1947년 『경남교육』 편집부장으로 일했으며, 1948년 『부산일보』 초대 문화부장으로 근무하며 경남ㆍ부산 지역에서 연극인으로,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첫 시집 『풍장』을 시문학사에서, 1953년 두 번째 시집 『김해평야』를 남광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50년 8월 좌익계 문화단체원으로 몰려 투옥되어 6개월간 고초를 겪다 부산일보에서 해임되었다.
1951년 거제 하청중학교 국어교사를 시작으로 하청고등학교, 부산 항도고등학교,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1951년 수도육군병원에서 주관한 영화 「3천만의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배우활동을 청산했다.
1967년 문협 마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71년 세 번째 시집인 『정진업 작품집(1)』과 산문집인 『정진업 작품집(2)』를 신조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76년 네 번째 시집 『불사의 변』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하였으며, 1981년 다섯 번째 시집 『아무리 세월이 어려워도』를 해조문화사에서 펴냈다.
한편 허버트 리드가 쓴 『시와 아나키즘』(형설출판사, 1983)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1983년 3월 28일 타계했다.
1963년 경상남도문화상(연극), 1967년 경상남도문화상(문학)을 수상했다.
1990년 5월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시비가 세워졌다.
정진업의 시는 ‘가난한 민중과 소외 계층에 대한 애착과 문명화의 거부, 기아와 허무의식 등을 표출하고 있으며, 표현상 서술시로서의 가능성과 시어의 평이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