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전남 해남군 출생. 1955년 『문학예술』지에 이한직에게서 첫 추천을 받았고, 1956년 같은 지면에 조지훈의 최종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풀잎』 등 7권의 시집을 간행했다.
박성룡은 1930년 7월 29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출생했다. 1935년 전남 광주로 이사하였으며, 한학자인 백부의 권유로 개명서당(開明書堂)에 다녔다. 1941년 광주서석공립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는 출생신고가 4세나 늦어져 12세에 입학한 것이다. 1945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46년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했다. 1951년 광주서중 4학년 때 교육법이 개정되어 중고교 과정이 분리되면서 광주고등학교 2학년으로 재편된 후, 1953년 3월 광주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중앙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인해 대학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1955년 김정옥ㆍ이일ㆍ박이문ㆍ박봉우ㆍ윤삼하 등과 함께 〈영도〉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그해 12월, 이한직 시인에 의해 『문학예술』지에 「교외(郊外)」라는 작품으로 제1회 추천을 받았다. 1956년 4월 같은 지면에 「교외(郊外)ㆍ1」이라는 작품으로 이한직에 의해 제2회 추천을 받았으며, 7월에 「화병정경(花甁情景)」이라는 작품으로 조지훈에 의해 최종 추천을 받았다.
1957년 『신태양』사 기자로 입사한 후, 1958년 월간 『사상계』 기자로 근무했다. 1959년 『민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입사하여 1962년까지 근무했다. 1961년 박희진ㆍ성찬경ㆍ박재삼ㆍ이창대ㆍ이성교ㆍ박이도 등과 함께 〈60년대 사화집〉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1962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입사하여 1965년까지 근무했다. 1964년 『한국일보』 주간국 차장으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부평으로 이사하여 1975년까지 농부로 지냈다.
1969년 4월 첫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을 삼애사에서 출간했다. 1970년 9월 두 번째 시집 『춘하추동』을 민음사에서 간행했다.
1975년 동시 「풀잎」이 중학교 1-1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해『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 차장으로 다시 취업했다.
1977년 2월 제3시집 『동백꽃』을 신라출판사에서, 1978년 8월 산문집 『시로 쓰고 남은 생각들』을 민음사에서, 1982년 12월 제4시집 『휘파람새』를 서문당에서, 1987년 12월 제5시집 『꽃상여』를 전예원에서 간행했다.
1990년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을 역임한 후 정년퇴임을 했다.
1991년 12월 제6시집 『고향은 땅끝』을 문학세계사에서, 1998년 1월 제7시집 『풀잎』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2002년 7월 29일 타계했다.
1957년 전라남도문화상, 1961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1965년 현대문학상, 1980년 시문학상, 1986년 호남문학상, 1989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문학상, 1992년 3월 한국시협상,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문학상, 1997년 고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박성룡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들, 미약하나마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하는 위대한 자연을 평생을 바쳐 노래한 시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특히 미세한 자연의 물상들 뒤에 숨 쉬고 있는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예각화된 지성과 빠르고 직접적인 감각적 수법을 통해 형상화하는 데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