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敎) 서양화과를 졸업한 한국 유화가 1세대이다. 「자화상(自畵像)」과 「님프의 죽음」을 졸업작품으로 제출하였는데, 현존작으로는 도쿄예술대학교(東京藝術大學校) 미술관 소장의 「자화상(自畵像)」이 유일하다. 우수에 잠긴 눈동자와 노을 진 석양 빛 하늘 배경에서 외광파 양식과 낭만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님프의 죽음」은 작품이 망실되었고 작품 이미지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여서 작품 양식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작품 제목에서 ‘님프’ 와 ‘죽음’이 제시하는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낭만적 유미주의 경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초반에 『폐허(廢墟)』, 『창조(創造)』, 『영대(靈臺)』동인으로 활동 하면서 후기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상징주의 양식의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 한국유화가 1세대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였고 낭만적, 상징적 유미주의를 추구했다.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평가할 수 있으나 작품 활동 기간이 매우 짧고 미약하다.
호는 유방(惟邦), 포경(抱耿)이다. 평양의 부호 김진모(金鎭摸)의 차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고희동(高羲東)과 김관호(金觀鎬)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고(1912∼1917년), 귀국 직후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1917년). 1920년대 초반에 『폐허(廢墟)』, 『창조(創造)』, 『영대(靈臺)』동인으로 후기인상주의 미술 이후의 현대미술을 옹호하는 글과 더불어서 시, 산문 등 문필활동을 하는 한편 모던한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 1925년에 평양에서 활동하던 김관호, 김윤보, 김관식 등과 함께 삭성회를 조직하고 삭성회화연구소를 개소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8년에 삭성회미술학교 승격을 촉진하기 위한 ‘삭성미술학교설립 기성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작품 활동을 접고 고미술품 소장가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영화 수입업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