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화 (nude)

해질녘/김관호
해질녘/김관호
회화
개념
벌거벗은 인체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 나체화.
이칭
이칭
나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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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누드화는 벌거벗은 인체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나체화라고도 한다. 191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간 한국인 유화가들에 의해 한국 누드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누드화는 김관호의 「해질녘」(1916)이다. 이쾌대는 근대 미술가 중에서 가장 많은 누드 스케치를 남겼다. 그의 작품 중 「군상Ⅳ」(1948)은 한국인의 이상적인 신체 군상에 서사성을 가미하여 누드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일본 관학파풍으로 출발한 누드화는 점차 한국인의 체형을 고려하고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미감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전하였다.

정의
벌거벗은 인체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 나체화.
개설

20세기 초 서양화의 수용과 더불어 접하게 된 누드화는 ‘근대’의 새로운 기호였다. 한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누드화는 김관호(金觀鎬)「해질녘」(1916년)이다.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으로 약칭)에 출품된 한국인 미술가의 누드화는 대체로 신고전주의 양식과 외광파 양식이 절충된 일본의 관학파 양식을 따랐다. 1930년대부터는 일반인들도 전람회나 도록을 통해서 누드화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 누드화의 양상도 외광파, 신고전주의, 표현적 경향, 사실적 경향, 토속적 경향 등으로 다양해졌다. 한국에 누드 모델 직업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이며, 1960년대 말부터 행위미술, 사진, 비디오 아트, 영상 미술 등 새로운 미술 매체에 누드가 수용되면서 신체에 대한 해석도 확장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1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한국인 유화가 1세대들이 교과과정에서 누드 데생 교습을 받고 누드화를 그리게 되면서 한국 누드화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와 함께 고전적 훈련 과정으로 전수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국 최초의 누드화는 김관호의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작품 「해질녘」이다.김관호는 이 작품을 다시 일본의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에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하였는데, 이 희소식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어 큰 관심을 받았지만 막상 작품 사진은 ‘벌거벗은 그림’ 이라는 이유로 실리지 못했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전에 출품된 김관호의 「호수」, 1925년 제4회전에서 4등상을 수상한 이제창(李濟昶)의 「여인」도 나체화라는 이유로 촬영과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이하 국전)에서 입선한 김흥수(金興洙)의 「나부군상(裸婦群像)」이 나체 군상이라는 이유로 전시장에서 철거된 사례들은 20세기 중반까지 ‘누드(nude)’를 ‘나체(naked)’로 인식하는 통념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도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김인승(金仁承)의 「나부(裸婦)」가 창덕궁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 누드화의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사건이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에서 입선한 바 있는 이 누드화는 앵그르(J. A. Dominique Ingres)와 다비드(J. Louis David)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전형적인 아카데미즘 화풍이다. 김인승 등 일본 도쿄미술학교 출신 화가들을 비롯해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 출신의 박득순(朴得錞), 손응성(孫應星)도 고전주의와 외광파 양식이 혼재된 누드화를 그렸고, 해방 이후 이러한 양식이 국전으로 전승되어 관전 양식을 형성했다.

이쾌대(李快大)는 근대 미술가 중에서 가장 많은 누드 스케치를 남긴 작가이면서 「군상Ⅳ」(1948년)과 같이 한국인의 이상적인 신체 군상에 서사성을 가미하여 누드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편 거칠고 굵은 필선, 원색의 대비, 형상의 왜곡으로 당대 최고의 전위작으로 꼽히는 구본웅(具本雄)의 「여인」(1930년대 전반)은 근대미술품 중 최고의 전위작으로 꼽힌다. 일본 유학파 출신들의 아카데미즘 양식과 달리 이인성(李仁星)김중현(金重鉉)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한국인 안면 골상과 다부진 인체의 골격 및 비례로 토속적 누드를 추구하였다. 토속적 누드화는 광복 후에 ‘토속적 에로티시즘’으로 불리는 최영림(崔榮林)의 누드화로 이어졌다. 동양화 부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누드화는 장운상(張雲祥)의 1961년 제10회 국전에 출품작으로 유화에 비해 약 반세기 정도 늦게 출현하였으며, 박생광(朴生光), 천경자(千鏡子), 이숙자(李淑子) 등 채색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195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비구상미술이 화단의 주류가 되자 누드화에 대한 인식은 조형작품으로서가 아닌 시각적 기초 훈련 과정으로, 혹은 지나간 고루한 장르로 평가 절하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구상미술의 재부상과 함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등 영상미술 분야에서 누드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일본 관학파풍으로 출발하여 점차 한국인의 체형을 고려하고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미감을 반영한 누드화로 진전하였으며 보편성, 조형성, 실험성을 겸비한 조형미술의 한 장르로 정착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근대회화에서의 누드」(김영나,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서양미술사학회, 1993)
「한국누드미술의 정착과 그 양상」(이구열, 『한국의 누드미술 80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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