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에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 1세대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도쿄예술대학교(東京藝術大學校) 미술관 소장품인 「자화상(自畵像)」을 제외하고는 현존작이 없다.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제2회전부터 제6회전까지 계속 출품하여 4등상(제2회)과 3등상(제3회)을 수상하였고,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이후에는 작품 활동보다 고미술 애호가로 골동품 수집에 정열을 기울였다.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나전와당문(螺鈿瓦當文)핸드백」을 출품, 전통 공예의 미와 기법을 현대 디자인 제품에 응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생몰년과 출생지는 미상이며 호는 동해(東海)이다. 1919년 고려화회(高麗畵會)에서 유화의 기초를 배웠다. 1924년에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다음해서울 YMCA 미술반에서 학생을 지도하였다. 도쿄미술학교에 제출한 「자화상」은 당시 유행하던 안경과 하이칼라 양복 윗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은 모습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이 확인된다. 불어로 쓰인 붉은 색 사인과 글은 서구 근대, 특히 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읽을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제2회전부터 제6회전까지 연속 출품하여 2회전(1923년)에서 4등상, 3회전(1924년)에서 3등상을 수상하였으며 9회전에도 서양화부에 출품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들을 도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교회나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을 그린 풍경화, 금붕어와 어항, 임금 등 모던한 소재의 정물화여서 모던한 취향과 사실적 재현풍이 확인된다.
1927년에 김복진(金復鎭)이 주도했던 창광회(蒼光會) 창립에 위원으로 참여, 경성본부 간사직을 맡았으나 김복진의 검거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다. 1930년에는 도쿄미술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모임인 동미회(東美會)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1930년경 학생시절부터 동경했던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골동품 수집가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