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는 과일·꽃·그릇·어류 등 정지된 물체를 배치하여 구도를 잡아 그리는 그림이다. 서양에서 18세기 프랑스 화가 샤르뎅에 이르러 아카데미에서 인정하는 위상을 획득했다. 우리나라 20세기 초 서구 미술의 수용과 더불어 유입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와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서 아카데미즘 양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1930년대부터 야수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화풍의 정물화도 그려졌으며, 광복 후에는 반추상, 추상 양식의 추상화도 그려졌다. 정물화는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객관적 시각과 인식을 확립시켜 근대성의 획득에 일조했다.
생활 주변의 물상들을 소재로 선택하여 배열하고 구도를 잡아 그리는 정물화는 20세기 초 서구미술의 수용과 더불어 유입되었다. 안정된 구도와 윤택한 색감으로 물상을 재현하는 정물화의 훈련 방식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와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이하 국전)를 통해서 아카데미즘 양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1930년대부터 야수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화풍의 정물화도 그려졌으며, 광복 후에는 반추상, 추상 양식의 추상화도 그려졌다.
서양에서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독립된 장르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18세기 프랑스 화가 샤르뎅(Jean-Baptiste-Siméon Chardin)에 이르러 아카데미에서 인정하는 위상을 획득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세잔(Paul C Zante)에 의해서 공간의 구조적 관계를 탐색하는 조형적 실험의 장으로 정물화의 신 영역이 개척되었다.
한국에 정물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시기는 20세기 초엽 유화(油畵)의 전래와 함께한다. 그러나 1890년대에 발행된 교과서에 생활 주변의 소재를 투시도법과 음영법을 사용해서 간략하게 묘사한 범화(範畵)가 실리면서 물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도화(圖畵) 교과서의 ‘용기화(用器畵)’를 통해서 사물을 재현하는 시각적 기초 훈련이 실시됨으로써 정물화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회화에도 화훼도(花卉圖)ㆍ 책가도(冊架圖)ㆍ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등 정물화와 유사한 화목(畵目)이 존재했지만, 화훼도나 기명절지도가 자연물의 생명감과 물상에 부여된 길상적 의미를 중시하는 데 비해서 정물화는 형(形)과 색채와 공간을 탐구하는 데에 목적을 두어 재현 방식과 개념에서 양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조선미전 서양화부 출품작 중 1/4을 차지할 정도로 정물화의 비중은 풍경화 다음으로 높았다. 대체로 꽃ㆍ화병ㆍ과일이 주 소재로 채택되었고, 안정감 있는 공간 표현을 위해서 삼각형 구도를 택하는 등 초보적인 수준의 정물화 유형으로 정형화되었다. 탁자 위에 사과를 배열하고 천을 내려뜨린 세잔 풍의 정물화가 유행하였으나, 세잔이 성취한 근대적 혁신성을 이해하고 수용했다기보다는 세잔 정물화와 유사한 소재와 배치를 교과서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윤상열(尹相烈)과 강신호(姜信鎬) 등이 야수파풍의 신감각적 정물화를 출품하였고, 재야에서 활동했던 구본웅(具本雄)의 1930년대 전반기 정물화도 신선한 색감, 복수의 시점 및 평면적 구성을 취하여 화단의 이채(異彩)를 선도하였다.
조선미전에서 정형화된 정물화 유형은 광복 후 국전으로 이어져 항아리, 꽃, 과일 같은 소재를 안정된 구도로 배치하여 치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아카데미즘 화풍을 형성하였다. 입체파적 반추상과 추상화 양식의 정물화도 시도되었지만, 양적으로 주류를 이룬 것은 아카데미즘 화풍의 정물화였다. 1970년대에는 ‘국학(國學)’ 열풍의 여파로 화훼류보다 고가구나 백자 같은 고미술품이 배열된 정물화가 많이 그려졌다. 이후 극사실주의, 팝아트, 개념미술의 등장에 따라 정물의 개념은 현대 소비산업사회의 기호나 오브제(Object)로 확장되었다.
정물화는 순수미술의 한 장르를 구성하면서도 학교 교육 과정에서 적극 활용됨으로써 원근법과 명암법, 형태와 색채의 훈련 및 사물의 배치와 구성력을 증진시켰으며, 객관적 시각과 인식을 확립시켜서 근대성의 획득에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