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으며 작품 제작과 비평 활동을 겸하였다. 현존 작은 없으나 활동 당시 신문 지면에 실린 작품 사진 이미지로 제1회 녹향회전에 출품한 「유구(悠久)의 봄」과 「인물(人物)」이 전해져 ‘노장의 허무경’이라는 주제 의식과 세잔느 풍을 확인할 수 있다. 1928년 ‘녹향회’ 창립 취지문으로 발표한 글에서 아세아주의미술론을 먼저 선보인 후 1930년에 본격적으로 ‘아세아주의미술론’을 발표, 프롤레타리아 미술 진영과 대립하고 동양주의 미술의 물꼬를 열었다. 이하관(李下冠)은 「조선화가총평(朝鮮畵家總評)」(1929년)에서 심영섭에 대해 “환상의 세계와 같이 노장(老莊)의 허무경(虛無境)에서 화필을 놀리는” 화가라고 평하였다.
생몰년 미상,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교육 사항 등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녹향회(綠鄕會) 창립에 가담하면서 쓴 글로 처음 화단에 등장하였고(1929), 1930년에 동아일보 지면에 「아세아주의미술론(亞細亞主義美術論)」을 총 1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서양에 대한 동양의 사상적, 문화적 우수성에 입각하여 반문명, 반근대, 비정치적 순수성을 주장하고 후기인상주의 미술 이후의 주관성, 심미성, 표현성을 강조하는 심영섭의 아세아주의미술론은 정하보(鄭河普), 안석주(安碩柱) 등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반격을 받았고, 이태준(李泰俊), 김용준(金瑢俊), 구본웅(具本雄) 등 동양주의 미술론자들로부터는 옹호를 받았다. 노장 사상과 선불교에 심취하여 인생의 허무경을 표현하는데 궁극의 목적을 두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 낙향하여 미술활동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