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녹향회전(綠鄕會)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 현존작으로는 도쿄미술학교(東京藝術大學校) 졸업시 제출한 「자화상」(1928, 도쿄예술대학교미술관 소장)이 유일하다.이하관(李下冠)의 평문에 의하면 박광진의 그림은 데생에 충실한 형태감과 풍부한 색감과 호방한 필치의 화풍이었다고 한다.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에서 서양화반을 지도하였다. 남북 분단 후 북한에서의 활동상이 포착되는 것으로 보아 광복 후 고향 개성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2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 직후에 녹향회 창립 동인으로 전시에 출품하였다. 녹향회 공모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녹향회가 폐지될 때까지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1928∼1931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시에 제출한 「자화상」을 제외하면 전해지는 작품이 없으나 1931년 녹향회전에 출품한 「정물」의 이미지가 실렸다.(조선일보, 1929. 5. 26).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출품하지 않았고, 1935년에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에 출품하였다. 금광사업에 성공하여 김은호(金殷鎬)와 김복진(金復鎭)이 주도했던 조선미술원에 터를 제공하고 서양화반을 지도하였다(1936∼1938년). 1937년에는 개성 출신 화가들을 초대하여 개성에서 개최된 향토미술전(鄕土美術展)에 참가하였고, 중견작가 양화소품전(中堅作家 洋畵小品展, 1938년), 서양화가 수묵화전(西洋畵家 水墨畫展, 1942년)에 출품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개성에서 남하하지 않은 듯 1957년 조선미술가동맹 기관지인 『미술』 3호에 유화 「계곡」 도판이 게재되었으나, 그 후의 활동상은 불명확하고 사망연도도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