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에 일본을 통해서 일점 시각에 입각한 서구 근대의 풍경화를 수용한 이후 풍경화는 한국 구상회화의 주 경향이 되었고 산수화의 근대적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에는 바르비죵파(Barbizon School: 182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까지 프랑스 바르비죵이라는 마을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모여든 화가들을 가리킴)와 외광파(外光派: 19세기 프랑스에서 인공 조명을 거부하고 태양광선에 비춰진 자연을 묘사하려는 태도 및 화가들을 가리킴)풍의 풍경화가 주를 이루었고 193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의 풍토에 적합한 풍경화를 탐구하는 조류가 확산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풍경과 심상이 입체파적 분할법으로 표현되는 한편 향토의 순박한 정서와 동심의 시각에 입각한 풍경화로 근대 사회에 의해 훼손된 감성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추상미술과 실험적 현대미술이 주류가 되면서 구상적 풍경화는 구시대적 유산으로 평가절하 되기도 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 구상미술이 재부상하면서 회화 뿐 아니라 사진, 판화, 비디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새로운 접근이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풍경화가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10년대이며 1920년대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 출품작 중에 「풍경(風景)」이라는 제목으로 무명의 장소를 그린 풍경화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원근법과 투시법 등 시각적 사실성에 충실했던 초기의 풍경화는 근대적 보통교육의 산물이지만 주변 경관을 그린다는 점에서 동양의 ‘산수화(山水畵)’와 상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산수가 단순한 경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의미와 정서로 충만한 이상향인 반면에 풍경화에서 경관은 화가에 의해 선택되고 배치되는 물체에 가깝다. 산수화와 풍경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 자연관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풍경이 발견되어 재현되는 과정은 동양 고유의 자연관이 서구 근대의 자연관으로 대체되고 근대적 회화 개념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 속한다.
1916년 10월 20일자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실린 김관호(金觀鎬)의 「풍경(風景)」은 현재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에 한해서 한국인이 그린 가장 이른 시기의 풍경화이다.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재학 시절에 교육 받은 외광파 화풍으로 바람 부는 교외의 풍경을 담은 「풍경」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제목 설정 자체에서 이미 근대적 회화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일본의 관전에서는 인물화가 주종을 이루었음에 비해서 조선미전에서는 풍경화가 평균 50%가 넘을 정도로 풍경화가 우세하였다. 산수화 전통이 강했던 한국 미술의 특징이 반영된 결과로 여겨지는데, 금강산을 비롯하여 빼어난 절경으로 공인된 명승지, 옛 건조물이나 성곽 등의 고적지, 이름 없는 시골이나 산촌의 목가적 경치 등이 그려지면서 산수에서 풍경으로의 이행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토, 향토 의식에 입각한 풍경화의 구상이 시작되었다. 오지호(吳之湖)와 김주경(金周經)은 한국의 건조한 대기와 선명한 빛깔을 밝은 색감으로 표현하여 한국적 기후 풍토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인성(李仁星)과 김용조(金龍祚)는 성당, 도시의 뒷골목, 해수욕장 등 근대의 일상적 풍경을 경쾌한 색조로 표현하는 한편 ‘푸른 하늘과 붉은 땅’의 기호로 민족의 향토경(鄕土景)을 제시하였다.
1950년대에는 입체파적 분할 양식으로 6.25전쟁의 상흔이 드러난 풍경을 표현하거나 고향과 전원 풍경을 반추상 양식으로 구성하는 등 모더니즘 양식의 풍경화가 성행하는 한편 손응성(孫應星)의 「비원」시리즈와 같이 시각적 재현에 집중하는 풍경화도 여전히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대종을 점하였다.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을 많이 그린 진양욱(晉良旭)과 배동신(裵東信), 제주도의 풍경과 산천을 담은 변시지(邊時志), 강요배(姜堯培) 등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낸 풍경화가 큰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풍경화는 전통적 자연관이 서구적 자연관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르로서 관학파 풍의 중심을 이루는 동시에 한국의 풍토미, 지역적 정체성을 담은 풍경화를 전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