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에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창오다. 1939년에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42년에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사 활동도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노래와 작사를 병행했고, 이후로는 주로 작사에 주력했다. 1950∼196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작사가로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고, 한국연예협회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 대중가요 관련 각종 단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넉넉했으나 곧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939년 태평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콩쿨에 당선되어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데뷔를 했고,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마상일기」 등 인기곡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1942년부터는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사 활동도 시작했는데, 직접 부른 「꽃마차」가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반야월이라는 필명으로 1942년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의 가사를 쓰면서 작사가로 활동했고, 진방남으로 노래를 부른 군국가요로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 지원병의 노래 등 여럿 있다.
광복 이후에는 남대문악극단을 운영했고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가수로서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으나, 이후로는 작사 활동에 주력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이사(1956년), 한국연예협회 창작분과 초대 위원장(1961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1964년) 등 다양한 단체 활동을 통해 대중가요계의 정체성 확립과 권익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까지도 현역 작사가로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고, 1990년대 이후 대중가요계의 대표적인 원로로 부각되었다. 2010년에는 1940년대 전반에 군국가요 관련 활동을 했음을 공식 사과하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타계 직전까지 자료 기증 협의 등 대외 활동을 하다가 2012년 사망했다. 대중이 보다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와 표현법으로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 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전쟁 이후 월북 작사가들의 작품이 금지 대상으로 떠오르자 추미림, 박남포 등의 필명으로 개사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1991년에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