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신허는 1863년 이후에 러시아 이주 한인이 모여 산 최초의 한인 마을이다. ‘지신허(地信墟, 地新墟)’, ‘지신하(地新河)’, 레자노보(Rezanovo)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연해주 일대에 만들어진 한인 집단 거주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이다. 1863년 함경도 출신 최운보와 양응범이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1864년에 60가구 308명에서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다. 1937년에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 뒤, 러시아 농민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
19세기 후반에 연해주 일대의 여러 곳에 만들어진 한인 집단 거주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의 하나이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 사회의 중심이자 발원지로 자리하였다.
지신허는 ‘계심하(鷄心河)’, ‘티진헤(Tizinhe)’라고 불리는 강의 이름을 중국식 발음으로 부른 것이다.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우리나라의 한자 발음에 따라 ‘지신허(地信墟, 地新墟)’, ‘지신하(地新河)’ 등으로 표기하였다. 러시아에서는 1865년에 한인들의 정착 요청을 당국에 보고하였던 노보고로트 초소의 대장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Rezanovo)라고 불렀다.
1868년에 러시아의 탐험가 프르제발스키(N. M. Przhevalskiy)는 이 마을을 방문하여 ‘가장 광활하고 오래된 한인 마을’이라고 하였다. 마을은 지금은 비노그라드나야강(Vinogradnaya江)으로 이름이 바뀐 티진헤강 주변에 자리하였다. 내륙으로 뻗은 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이 약 16km 길이에 폭 1~1.6km 정도의 분지를 감싸고 있다. 분지에 위치한 마을의 한 가운데로는 티진헤강이 활처럼 굽이치며 흐르면서 비옥한 농토를 형성하였다.
1863년에 처음 마을이 생겼을 때, 당시 러시아 수비대 초소가 설치되었던 탐험대만(Bukhta Ekspeditsii灣)은 19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중국 땅인 훈춘은 북쪽으로 14km 가량 거리를 두었다.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간 것은 1860년 이전부터 이미 흔한 일이었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영구 정착을 목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것은 1863년 12월 쯤이다. 곧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崔運寶)와 경흥 출신인 양응범(梁應範)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처음으로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인들은 러시아의 국유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러시아 수비대 초소대장에 호소하였다.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카자케비치(P.V.Kazakevich)는 수비대에게 한인의 정착과 보호를 명령하였고, 그 뒤 지신허 마을을 중심으로 티진헤강 주변에 대한 개척이 본격화하였다.
지신허 마을은 1864년에 60가구 308명이 살았지만, 1868년에는 165가구로 늘었고,1869년에는 766가구가 거주하는 대표적인 한인 마을로 성장하였다. 1882년에는 조선 관료인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지신허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에 의하면, 마을은 남북으로 수십 리, 동서로 4~5리 였는데,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서양인이 세운 초소와 함께 서양인이 설립한 기숙학교인 서학서숙(西學西塾)이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으며, 마을 출신의 의병활동가들이 마을에서 활동 자금과 의병을 모집하곤 했다고 전한다.
지신허 마을은 1937년에 스탈린이 강제이주 조처를 취하여 한인들을 전부 분산시킨 뒤, ‘우로치쉐 비노그라드노예(Urochishche Vinogradnoe)’라고 불리는 러시아 농민의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91년 전후에는 러시아 농민의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2000년 이후에 연해주 하산 지역의 비노그라드노예(Vinogradnoe) 일대가 지신허 마을임이 확인되었다. 2004년에는 마을 입구 왼쪽에 한국 가수 서태지의 기부로 지신허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