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쿠바로 이민하여 살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한인들에 대한 교육활동에 힘썼다. 특히 쿠바 한인의 민족 정체성 확립과 함께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2살 때인 1905년 4월에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 유카탄(Yucatán)으로 이민을 갔다. 그 뒤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하다가 1921년 3월에 다시 쿠바로 건너가서 마탄사스(Matanzas)에 정착하였다. 6월 14일에 마탄사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Cuba地方會)가 설립되었을 때 서기로 활동한 이후 쿠바지방회가 마탄사스지방회로 바뀌어도 여전히 서기를 맡았으며, 그 뒤에도 부회장, 재무, 총무, 학무원, 대의원, 평의원, 대표원 등을 지냈다. 1942년에는 마탄사스지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22년 11월 1일에는 민성국어학교(民成國語學校)가 설립되었는데, 이곳에서 교사를 맡아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 뒤 1929년에 카르데나스(Cardenas)로 이주하여 다음 해부터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3월에 휴교 상태였던 진성국어학교(進成國語學校)를 다시 열어 교장을 맡았다. 1931년 3월에는 청년토론회를 조직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한인 청년에게 한국의 언어와 풍습, 전통과 문화 등을 가르쳤다. 그 뒤 1932년에 마탄사스로 돌아온 뒤에도 민성국어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3월 10일에 청년학원(靑年學院)을 설립하였다. 청년학원은 12세 이상의 한인 청소년에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 한인 청년들을 장래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독립한 조국의 건설 일꾼으로 육성하려는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1938년 7월 10일에는 마탄사스에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이 창설되었는데, 고문으로 추대되어 쿠바 한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한편 1926년부터 국내와 연결하여 천도교(天道敎)의 사상과 교리를 받아들였다. 특히 천도교를 확산시키려고『신한민보(新韓民報)』에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사상과 천도교 교리를 실었다. 1930년 3월 23일에는 쿠바에서는 처음으로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을 설립하였다. 1933년에 국내의 천도교 청년당원이 된 뒤, 이듬 해 3월 8일에는 ‘덕암(德菴)’이라는 도호(道號)와 도첩(道帖)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 최린(崔麟, 1878∼1958)의 친일 행각을 전해 듣고는 다시 개신교 감리교인이 되었다.
1943년 4월 18일에 쿠바의 중심지인 아바나(Habana)에서 아바나지방회, 마탄사스지방회, 카르데나스지방회 등 3곳의 지방회 대표가 모여 ‘재큐한족단’을 발족할 때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서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쿠바 정부에게 한인의 신분 보장, 일본에 대한 공동 항일전쟁 수행 등을 요구하였고,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특히 10여 년 동안 『신한민보』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쿠바 한인의 사정을 국내외에 알리기도 하였다. 1931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한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의『공보』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행된『한민』,『한청』등의 잡지를 쿠바 한인 사회에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1년 4월부터는『신한민보』에 「쿠바 재류동포의 이주 20년 역사」를 게재하였다. 1954년 2월에는 이 글을 묶어 쿠바 한인의 역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큐바이민사』를 태평양주보사에서 발간하였다.
1997년 8월에 쿠바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