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지방회 (Cuba )

정치
단체
쿠바 한인이 마탄사스에 세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이칭
이칭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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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쿠바 한인이 마탄사스에 세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개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마탄사스(Matanzas)지방회’라고도 부른다. 마탄사스에 이민을 온 한인들이 일본 영사관의 간섭에 반발하여 설립하였는데, 쿠바 한인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힘썼다.

설립목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의 설립 근거에 따라, 한인의 자치와 권익 옹호, 교육과 실업 부흥, 조국 독립운동을 도모하였고,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구제하였다.

연원 및 변천

멕시코의 한인들은 쿠바의 우수한 교육문화시설, 설탕 산업의 활황(活況) 등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배를 타고 쿠바로 이민하였다. 1921년 3월 25일에 한인 300여 명은 마나티(Manati) 항구에 도착하였는데, 그 때에 설탕 가격은 1파운드(pound)당 22.5센트에서 3센트로 급격히 하락하였다. 한인들은 겨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였지만, 고된 노동에 비해서 임금은 생활을 꾸리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5월 31일에 김세원과 박창운은 에네켄(henequén) 농장의 주인과 계약을 맺었다. 한인들은 이미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가졌고, 쿠바의 에네켄 산업은 점차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다수의 한인은 마탄사스의 핀카 엘 볼로(Finca El Bolo) 마을로 이동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한인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일본 신민으로 등록하려고 하였다. 60여 명의 한인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는, 1921년 6월 14일에 쿠바 한인을 대표하는 자치 기구이자 공식 대표 기구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설립을 의결하였다. 이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 인준을 요청하여, 7월 6일에 인준을 받았고, 11월에는 마탄사스 시당국의 허가까지 얻었다. 1921년 9월과 1923년 3월에는 각각 마나티지방회와 카르데나스(Cardenas)지방회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쿠바지방회는 1923년 5월 이후부터 지역 이름을 따서 ‘마탄사스지방회’로 불렸다.

1941년 당시에 쿠바에 거주하던 한인은 대체로 360∼370명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카르데나스에 100여 명, 아바나(Havana)에 40여 명, 다른 지역에 2∼5명 정도가 거주하였던 반면 마탄사스에는 125명이 살았다. 마탄사스지방회는 설립 초기에 회원들이 급격히 감소하여 모임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지만, 점차 거주 한인이 늘면서 모임의 규모도 커져서 쿠바의 대표적인 한인 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대 회장인 서문경을 중심으로 김치일, 장영기, 양춘명, 박창운, 임병일 등이 회장 겸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임천택(林千澤, 1903~1985), 이세창, 이인환, 박두현, 김덕순 등도 주요 직책을 맡았다.

기능과 역할

이 지방회는 쿠바 한인들의 안녕과 권익을 보호하는데 앞장섰기에, 단순한 한인 단체이기보다는 정부적 차원의 자치 기구이면서 독립운동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곧 1922년 11월에는 한인 마을 안에 민성국어학교(民成國語學校)를 세워 한인 2세 아동에게 한글과 함께 한국의 역사문화를 가르쳤다. 그 뒤 박창운과 임천택은 1932년 3월 10일에 청년교육기관으로 청년학원(靑年學院)을 설립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장차 독립을 맞을 새로운 국가 건설을 대비하도록 하였다. 특히 청년교육사업은 1936년에 마탄사스지방회 청년부가 편제되면서 계승되었다.

또한 매년 3·1절과 8·29국치기념일을 잊지 않고 기념하면서 독립 의지를 높이고자 하였고, 독립의연금을 납부하여 광복군을 후원하면서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아울러 구제금을 거두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인 동포를 구제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밖에 1942년 7월 4일에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경축행렬에 참가하거나 12월 9일에 개최된 쿠바 선전기념 1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여 쿠바 한인의 위상을 제고하면서 한국의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알리기도 하였다. 1941년 4월에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자, 카르데나스지방회·아바나지방회와 함께 1943년 4월 18일에 이종헌을 단장으로 한 재큐한족단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후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독립운동 지원, 쿠바 한인의 안녕과 권익 보호, 독립금 모금운동 등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현황

1944년 말에 핀카 엘 볼로의 농장이 팔리면서, 한인들은 점차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에 따라 회원들은 급격히 감소하였고, 1950년대 초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지방회는 민족 교육과 권익 보호, 조국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한인 단체였로, 쿠바 한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해체된 뒤에도 새로운 쿠바한인회가 만들어지는데 초석이 되었다.

참고문헌

『쿠바의 한인들』(정경원 외 옮김, 재외동포재단, 2004)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이자경, 지식산업사, 1998)
『유카딴의 첫 코리언』(이영숙 편, 인문당, 1988)
『쿠바이민사』(임천택, 태평양주보사, 1954)
「쿠바한인이민사」(안금영,『멕시코 쿠바 한인이민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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