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3월에 대한인국민회가 쿠바에 세 번째로 세운 지방회로, 마탄사스(Matanzas)에서 카르데나스(Cardenas)로 이주한 한인들의 자치 기구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의 설립 근거에 따라, 한인의 자치와 권익 옹호, 교육과 실업 부흥, 조국 독립운동을 도모하였고,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구제하였다.
1922년에 마탄사스 지역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은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 따라 흩어져 살았기에, 마탄사스 지역과 달리 한인 마을을 이루지 못하여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1923년 3월 8일에 한인들은 카르데나스 지역 한인 사회의 중심 기구로 카르데나스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동시에 마탄사스 지역에 세운 민성국어학교(民成國語學校)처럼 진성국어학교(進成國語學校)도 설립하여 한인 2세들에 대한 민족 교육에 힘썼다. 그 뒤 1927년에는 카르데나스 지역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한인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학교 운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1929년 11월에 임천택(林千澤, 1903∼1985)이 카르데나스지방회 차기 회장으로 선임된 뒤, 1930년 3월에 진성국어학교를 다시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쿠바 최초로 천도교(天道敎) 종리원(宗理院)을 열어 천도교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청년 토론회를 조직하여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교육에도 나섰다. 그러나 임천택이 다시 마탄사스로 이주하자, 한인들은 계속된 노동 정지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겪어 지방회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지방회는 민족 교육과 구제 활동, 실업 증진,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카르데나스 지역 한인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대외 활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인들을 도우려고 노동회를 설립하거나 독립 기금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윤상이 초대 회장을 맡은 이래, 강흥식, 김세원, 박두현, 임천택, 김덕순 등이 회장을 지냈고, 김연규와 홍익삼은 각각 1937년과 1941년에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 태덕일, 허영보, 호근덕, 이명상, 김덕순, 장윤익, 박희용, 윤창일, 방경일, 장호만, 윤창배, 구연억 등이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4월에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자, 1943년 4월 18일에는 마탄사스지방회·아바나(Havana)지방회와 함께 이종헌을 단장으로 선임한 재큐한족단을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후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독립운동 지원, 쿠바 한인의 안녕과 권익 보호, 독립 기금 모금운동 등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에 한인 회원이 감소하면서해체되었지만, 1953년 초에 카르데나스 한인청년구락부가 설립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그 뒤 쿠바한인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이 지방회는 민족 교육과 권익 보호, 조국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한인 단체로, 쿠바 한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해체된 뒤에도 새로운 쿠바한인회가 만들어지는데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