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30년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창극 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 월북하여 사회주의 창극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호적은 담양읍 객사리 241)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장원(朴壯元), 어머니는 배금순(裵今巡), 외조부는 판소리 명창 배희근(裵喜根)이다. 8세부터 부친에게, 나중에 서편제 명창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다. 1909년 12세의 소년 명창으로 부친과 함께 광주 양명사(陽明社) 창극 공연에 참여하여 춘향 역을 맡은 것으로 전하며, 이후 1910∼1935년 무렵까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화순협률사, 리리협률사, 부안협률사 등의 창극 공연에서 널리 활동하였고, 1936∼1945년까지는 청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공기남·임소향·조상선 등에게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박석기의 후원으로 김소희·한애순에게 심청가를 전수하였다. 1939년 오케 레코드에서 「흥보치부가」와 단가 「초한가」를 취입하였다. 광복 후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에 안기옥·정남희·조상선·임소향·공기남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창극 「춘향전」, 「리순신장군」을 만들었으며, 단가 형식의 「김장군을 따르자」를 창작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여 창작판소리 「녀성영웅 주옥희」 「보천보출진」 「해군영웅 김군옥」 등 9편, 장가 형식의 「조국해방실천사」, 「새로운 조국」, 「사회주의 좋을시구」, 「승리의 10월」 등 10편, 단가 형식의 「해방의 노래」, 「단결의 노래」, 「금강산 휴양의 노래」 등 수십 편을 작곡했다. 1954년과 1956년에는 예술단을 이끌고 중국을 순회하면서 창극 「춘향전」, 「심청전」을 공연하였다. 1956년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판소리의 쐑소리(수리성)를 버리고 맑은 목을 쓰는 주체창법으로 전환하였다. 1958년에 공훈배우, 1961년에 인민배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개성 관음사에서 공기남·임소향·조해숙·신우선 등에게 판소리 5바탕을 재전수하여 녹음하였다. 1956년 전쟁고아 박영선·박영순을 자녀로 입양하였고, 1968년 12월 4일 향년 71세로 작고했다. 박동실은 구성진 수리성을 지녔고, 정교하고 치밀한 소리를 구사하였으며, 특히 초창기 창극과 창작 판소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한애순으로 전승된 심청가는 대표적인 서편제 판소리 바디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