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손병두 · 김창진 · 박지홍 · 유성준 · 정정렬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1960∼70년대에 판소리 5바탕을 처음으로 완창하였다. 「숙영낭자전」, 「충무공 이순신전」, 「예수전」 등을 비롯해 여러 창작 판소리를 지었고, 수많은 공연을 통해 대중적인 큰 인기를 끌었다.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창극단장을 역임하였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박동진은 1916년 7월 12일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은 농사를 지었으나 조부는 줄광대였고, 숙부도 소리를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다니던 중 협률사 공연을 보고 판소리에 입문하기로 결심하고 18세에 충남 청양의 풍물패 상쇠였던 손병두에게 도막소리를 배웠으며, 이어 김창진에게 「심청가」를 배웠다고 한다. 21세에는 정정렬(1876. 5. 21.∼1938. 3. 21.)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계속 박지홍의 「흥보가」, 유성준의 「수궁가」, 조학진의 「적벽가」를 배웠다고 한다. 여러 선생을 전전하며 짧은 기간에 소리를 배운 만큼 다양한 소리제를 경험할 수는 있었으나, 소리를 학습한 이력이 분명하지 않고 어느 바디도 완전한 전승이 되지 못하였다. 소리를 배운 뒤 일제 말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 무렵까지 혼란기에는 권번의 소리선생과 여러 국극단을 전전하였고,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민방위군 창극단에서 활약하기도 했으나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명창으로서 두각을 내타내지는 못하였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근무하면서부터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판소리 수련에 매진하여 6년 뒤인 1968년 9월 30일 남산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였다. 광복 후에 판소리 완창은 1956∼57년 임방울이 「수궁가」와 「적벽가」를 각각 2시간가량 부른 것이 유일한 기록이었다. 1930년대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도 판소리는 도막소리나 창극, 여성국극 형태로 공연되었다. 광복 직후 완창을 부를 수 있는 명창도 극히 적었고, 공식 무대에서 완창을 부르는 관례도 없었다. 5시간에 걸친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전통 판소리 공연 형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를 무명의 소리꾼에서 판소리계의 중심인물로 서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때부터 박동진은 판소리 5바탕은 물론, 실전(失傳) 판소리의 복원과 창작 판소리까지 계속 완창을 발표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흥보가」(1968년, 5시간), 「춘향가」(1969년, 8시간), 「심청가」(1970년, 6시간), 「변강쇠타령」(1970년, 5시간), 「적벽가」(1971년, 7시간), 「수궁가」(1972년, 5시간), 「배비장타령」(1972년), 「성서 판소리(예수전)」(1972년), 「이순신장군일대기(충무공 이순신)」(1973년), 「숙영낭자전」(1974년), 「팔려간 요셉」(1975년), 「옹고집」(1977년). 이러한 완창은 지금까지 아무도 넘어서지 못하는 대기록이다. 박동진은 한 스승으로부터 완전한 바탕소리를 물려받지 못한 대신 여러 스승을 거치면서 다양한 판소리의 더늠과 소리 특징, 공연 현장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기존 5바탕을 새로 짜서 자신의 소리로 가꾸었고, 여러 더늠을 두루 수용하여 길이도 대폭 늘였다. 또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전」 등 실전 판소리 사설에 새로 곡을 붙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박동진의 「예수전」, 「충무공 이순신」 등 창작 판소리이다. 「예수전」은 주태익이 쓴 사설에 박동진이 곡을 붙인 것으로, 판소리의 새로운 소재와 영역을 개척했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500회 이상 공연한 것으로 전한다. 「열사가」의 전통을 이은 「충무공 이순신」은 1960∼70년대 ‘이순신 선양화 사업’과 맞물려 창작된 곡으로 전바탕이 약 9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며, 박동진의 창작 역량과 소리 기량이 집약된 작품이다. 박동진은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 국립창극단장에 취임하였다. 박동진은 1970∼80년대 판소리 명창으로는 가장 많은 공연을 하였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판소리계에 완창 관례를 이끌어내었다. 1998년에는 고향 공주의 생가 터에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을 개관하였으며, 2003년 7월 8일 이곳에서 향년 87세로 작고했다. 박동진은 맑은 청구성 계통의 성음을 지녔으며, 스승의 소리를 판박이로 부르지 않고 자유로운 선율을 구사하였다. 그는 즉흥적으로 판을 짤 수 있는 당대 유일한 명창으로 꼽히며, 아니리와 재담에 능하여 대중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판소리의 반은 아니리’라는 말로 재담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피력하였다. 그의 소리에 대해 선율을 즉흥적으로 짜기 때문에 음악성이 부족하다든가 아니리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완창을 밥 먹듯이 하는 그의 소리 공력과 공연 능력은 당대 최고로 꼽히며, 조선조 광대놀음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요 녹음으로는 『박동진 애창곡집 판소리 다섯마당(1∼5)』(1971, 5LP), 『충무공 이순신』(1973, 5LP), 『적벽가 삼고초려, 적벽대전』(문화재관리국, 1976), 『인간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대전집』(SKC, 18CDs, 1988) 등 많은 음반과 공연실황 녹음이 남아있다.
은관문화훈장(1980), KBS 국악대상(1991), 방일영국악상(1996) 등을 수상하였고, 금관문화훈장(2003)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