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만의 제자로 일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한성태(韓成泰)는 1890년 전남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 한덕만(韓德萬, 1867∼1934)에게 가야금을 배워서 이름을 떨쳤으나 대우가 판소리 명창에 미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판소리를 배웠다고 전한다. 17세부터 김채만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1912년부터 광주의 협률사에 출연하여 소년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1920년부터 함흥 · 원산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지냈고, 이후 전주 · 이리 · 군산 · 목포 · 광주 · 서울 등에서 여러 권번을 전전하며 소리선생을 지냈다고 한다. 1931년 1월 7일 광주에서 급병으로 작고했다. 한성태는 원래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며, 박동실 제 「심청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다고 하나 그의 예술을 전승한 제자가 없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 1928년 빅타 레코드에서 취입한 단가 「경성명승」과 흥보가 중 「제비 몰러 나가는 데」, 「제비노정기」 등 유성기음반 2장(4면)이 있을 뿐이다. 한성태의 단가 「경성명승(京城名勝)」은 임방울이 녹음한 단가 「명기명창」과 사설이 대체로 동일한 곡으로, 앞쪽에 ‘기생점고’처럼 기생 이름을 나열하는 사설이 조금 추가된 것이 차이가 난다. 단가로는 특이하게 중중머리 장단으로 엮었는데, 때로는 단중머리처럼 말을 놓아가기도 한다. 중중머리 단가를 한성태가 처음 시도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판소리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또한 중중머리 「제비 몰러 나가는 데」는 권삼득제와 같으며, 곧바로 자진머리 「흥보 부부 품팔이」가 이어져 있다. 곡의 진행으로 보면 앞쪽에 오지만, 한 음반에 두 곡을 넣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판소리 목으로는 다소 얇은 편이고 약간의 발발성도 비치지만, 성음이 구성지고 기교가 빼어나므로 전형적인 서편제 판소리를 구해했음을 알 수 있다. 단가를 중중머리로 부른 것은 서편제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며, 그가 가야금병창에 능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성태는 41세에 작고하여 그의 예술이 직접 전승되지는 못했지만, 2남 한갑득(韓甲得, 1920∼1986)은 국가무형유산 거문고산조 보유자로, 3남 한갑주(韓甲珠, 1924∼2010, 예명:韓承鎬)는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