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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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이칭
이칭
한갑주(韓甲珠)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4년 3월 10일
사망 연도
2010년 1월 28일
출생지
광주시 동구 금남로
목차
정의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개설

성원목·박종원 등을 통해 김채만의 소리제를 배웠으며,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다. 1976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활동사항

한승호(韓承鎬, 1924∼2010)는 명창 한성태(韓成泰, 1890∼1931)의 3남으로 태어나 10여세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성원목(成元睦)·박종원(朴宗元)으로부터 김채만(金采萬)제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김채만의 소리는 박동실·박종원·박화섭 등을 통해 광주·담양 일대에서 널리 성행했다. 한승호는 김채만의 여러 제자들을 찾아다나며 그의 소리와 특징적인 더늠을 익혔으며, 10대 후반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견문했다고 한다. 한승호는 광복 전후인 20세 무렵 서울과 전남 등지에서 김채만 제를 알고 있는 애호가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30대 무렵인 1950년대에는 임방울의 공연 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한승호가 활동하던 1940∼1950년대는 일제 말에서 한국전쟁 기간이었으므로 그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활동은 후일의 대담을 통해 재구성된 만큼 활동사실과 정확한 연대를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1960년대에 상경하여 활동했고, 1974년 4월 2일에는 명동예술극장에서 ‘제1회 한승호 판소리 독창회 「심청가」를 공연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76년 6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승호는 일생동안 김채만 제 판소리의 미학을 추구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9살 때에는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던 ‘상쟁이영감(당시 80세)’을 강진까지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김채만의 소리는 광주 담양 일대에서 전승된 서편제 판소리의 대표적인 유파이며, 현재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한애순으로 이어지는 「심청가」가 널리 알려져 있다. 김채만-박종원-한승호로 전승된 심청가는 성음놀음이나 장단붙임이 더욱 화려하고 분방하다. 이는 한승호가 김채만제가 지니고 있는 성음놀음이나 기교를 극도로 화려하고 분방하게 추구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한승호는 구성진 수리성을 지녔으며,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다. 1976년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원형보존기록 사업의 일환으로 「적벽가」 ‘새타령-장승타령’ 부분이 녹음되었으며, KBS에서도 「심청가」, 「적벽가」 완창 녹음을 남겼다. 2010년 1월 28일 서울에서 작고했다.

참고문헌

『판소리유파』(이보형,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2)
「한승호 명창 대담자료」(이보형·성기련, 『판소리연구』제16집, 2003)
집필자
배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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