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꽹과리나 북 등의 악기를 치면서 염불로 축원을 하여 돈이나 쌀을 구걸하던 중의 무리이다.
굿중패의 연원은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온갖 놀이, 즉 잡희(雜戱)를 연행하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연희패의 연원에 매우 오래 된 것을 알 수 있다. 굿중패가 불교의 승려가 염불을 하면서 연희를 하던 유랑예인집단이라고 정의한다면 18세기에 그려진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 등에 이런 연희집단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는 매우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굿중패는 타악기를 치면서 염불을 하여 걸립을 하던 유랑집단이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가운데서 중이 법고를 치고 패랭이와 감투를 쓴 사내들이 꽹과리와 목탁을 두드리고 고깔을 쓴 중이 부채를 펼치고 시주를 기다린다. 이렇게 승려들로 구성된 놀이패인 굿중패는 조선 후기 이후 매우 성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가 굿중패의 역할을 대체하게 된다. 이들은 풍물, 버나(접시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한량굿(1인창극·배뱅이굿·장대장내굿·병신굿 등) 등을 놀았다. 특이한 것은 남사당놀이에서 큰 비중을 지니는 탈놀이인 '덧뵈기'가 없고, 솟대쟁이패의 주요 종목인 '솟대타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솟대쟁이패와 남사당패의 기량을 결합하여 한량굿이 덧뵈기·꼭두각시놀음·솟대타기를 포함할 정도였다고도 추측하나 완전한 모습은 파악되지 않는다.
현재 굿중패는 거의 사라졌고, 그 일부만이 남사당패놀이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