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시기에 형성된 연주형식으로 거문고 명인 신쾌동(申快童, 1910∼1977)이 처음 연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라도 일대에서 거문고연주자로 유명하여 각지에서 풍류와 산조를 연주하며 가르치고 있던 신쾌동은 목포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조선성악연구회 원로들과 인연이 되어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할 당시 명창 이동백 · 송만갑 · 정정렬에게 판소리, 임방울에게 단가「호남가」를 배웠다. 창극공연에서 여러 악기로 반주하며 악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 무렵 창극 공연에 배역을 받아 출연하기도 했다. 이때 터득한 창극반주법과 판소리 학습이 바탕이 되어, 소리에 거문고로 반주하며 연주한 것이 거문고병창의 시작이 되었다. 거문고 병창이라는 용어는 신쾌동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연주법은 거문고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용재총화』권10의 기록에 의하면 “거문고를 끌어당겨 연주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풍입송(風入松)을 타소서 하였다. 남자가 줄을 당겨 주(柱, bridge)를 옮겨가며 천천히 타니 그 소리가 아주 오묘하였다. 여자도 따라서 낮게 노래하니 소리가 구슬을 꿰는 것 같았다.”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악보나 실제로 전해지는 음악이 없어서 노래에 거문고로 반주하는 연주법이 사라졌다가 신쾌동에 의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판소리나 단가의 한 대목을 거문고 연주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곡으로는 적벽가 중 「새타령」 · 단가 「명인명창(팔도유람가)」 · 「호남가」가 있다.
반주는 장구가 곁들여 지는 것이 통례이며 장단구성은 원곡과 거의 일치한다. 소리선율을 거문고가 수성(隨聲)가락으로 따라가며 연주하는데, 소리의 공간을 거문고 선율로 채우거나, 거문고 간주를 넣어 흥을 돋우기도 한다.
신쾌동이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 중 · 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할 때 김영재(金永宰, 1947∼ )등에게 전수하였지만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제자 김영재가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거문고 산조 신쾌동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거문고 병창은 잘 연주하지 않아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