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 지역의 명창·예기(藝妓)를 모아 공연이나 경연을 할 때 전조선명창대회·전선명창대회·조선명창대회라고 했다. 간혹 팔도명창대회라는 말과 혼용하여 쓰기도 했다. 해방이후 전조선(全朝鮮)이라는 명칭은 전국(全國)이라는 말로 바뀌면서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명창대회는 1926년 11월 20일 광무대에서 열린 ‘명창대회’라는 공연이 크게 성공한 이후 판소리를 비롯한 음악공연 명칭으로 쓰였다. ‘전조선’·‘남도’·‘남녀’·‘일류’ 등 공연의 특색을 나타내는 말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전조선명창대회는 1930년대에만 10여 차례 열렸는데 명칭은 같지만 행사주최와 참가자가 모두 다른 일회성적인 행사였다. 공연방식으로 치러진 행사와 경연방식으로 치러진 행사가 있었다.
대표적인 공연은 1930년 9월 22일∼23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전조선명창대회이다. 팔도명창대회·조선팔도명창대회·조선각도명창대회라는 공연명을 두루 사용하고 있다. 이 공연은 경성의 조선권번·한성권번·한남권번과 대구 달성권번·광주권번·공주 예기상조회·평양 기성권번·원산 춘성권번·해주권번·강원도 무소속 등 기생들과 김창환·김창룡·이동백·정정렬·김추월·김초향·이화중선 같은 명창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풍류연주에 김기풍·김민송·김명수·이승환·임학준·방용현·심상건·지용구·최도성 등도 참석하였다. 평양기생들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와 관심을 끌었다.
전국의 각 지역 권번의 대표 기생들과 이름난 명창들의 공연이라 이틀간 경성방송국에서 중계방송했다.
1932년 4월 21일∼23일 예찬회(禮讚會)와 조선예기협회(朝鮮藝妓協會)에서 주최하고 단성사에서 열린 전조선명창대회는 처음에는 전선명창대회로 알려졌다가 공연 즈음에 명칭을 바꾸었다. 주요 신문사에서 후원하여 공연 한 달 전부터 계속해 알리고 있었다. 출연자는 경성·한성·조선·한남·대구·군산·원산·인천·평양·해주·진남포·각 권번 기생 백여 명과 조연으로 이동백·김창환·백점봉·오태석·심상건 등 명창들이 있었다.
1939년 11월 6일 추계 전조선명창대회는 부민관에서 열렸는데 남도단가·창극조·경기좌창·서도잡가·가야금병창·무용 종목을 김연수(金演洙)·임옥돌·박녹주·김여란·박초월·김소희·김유앵·박초선·조금옥·조난옥·김연수(金鍊守)·김옥련·신채란·한영숙·묵계월·조백조, 고수 한성준이 공연했다. 이외에도 1934년 5월 30일∼6월 1일 원산고아원 후원을 위해 열린 폴리돌 축음기회사 전속가수가 출연한 공연, 1935년 4월 18일 구례극장에서 열린 구례교(求禮橋) 낙성 축하공연, 1936년 2월 13일 마산에서 열린 극빈자 구제공연 등 다양한 형태의 전조선명창대회가 열렸다.
경연방식으로는 1935년 10월 20일 정읍예기조합이 주최한 경연, 1939년 10월3일∼4일 마산부신정정회(馬山府新町町會)에서 주최한 두 번의 행사가 있었다. 정읍은 일반 대중들이 투표하여 남창 일등 임옥돌(林玉乭), 이등 김동준(金東俊), 삼등 임대근(林大根), 여창 일등 전행화(田杏花), 이등 김목단(金牧丹) 삼등 김봉란(金鳳蘭)을 선발했다. 마산은 조선·매일·동아 신문에서 후원하여 경성·대전·전라·경상 등 23지역 권번 기생들이 참가하였고 김연수·유성준·임방울 명창이 찬조 출연하였다. 일등부터 육등까지 뽑아 상금을 주었다. 일등은 순천의 강산홍(姜山紅) 등외 특등은 11세의 김강남월(金江南月)이 입상하였다.
여러 지역 사람들을 모아 공연하는 전조선명창대회 방식은 다른 지역 출신이 자연스럽게 참여함으로서 레파토리가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효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