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악원 ()

국악
단체
1945년 10월 서울에서 결성된 국악연구 및 연주단체.
이칭
이칭
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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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5년 10월 서울에서 결성된 국악연구 및 연주단체.
개설

해방 후 전통음악인들이 조직한 가장 큰 규모의 국악연구 및 연주단체로 설립 당시 명칭은 국악원이다. 1948년 8월 대한국악원으로 단체명을 변경하였다.

설립목적
  1. 세계음악사상(世界音樂史上)에 독특한 조선국악의 원리를 파악하야 조선 국악의 체계적 이론을 수립하고 진지한 연구와 완전한 발전을 기함. 2. 조선전통의 음악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게 독점되었든 음악예술을 조선 민중에 절대 개방을 기함. 3. 본악이나 외래악을 물론하고 저열경부(低劣輕浮)한 음악은 철저히 배격하고 전통적 유아명랑(幽雅明朗)하고 순수한 신조선 음악건설을 기함. 이상 3개항의 강령을 1945년 10월 10일 출범하면서 발표하여 국악의 연구와 발전을 기하고자 하였다.
연원 및 변천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음악건설본부 국악위원회가 급히 구성되었다. 이후 국악건설본부로 개칭되었다가 같은 해 8월 29일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독립하면서 국악회로 변경되었다. 이 국악회(國樂會)가 규모와 체제를 갖추어 국악원(國樂院)으로 명칭을 바꾸고 1945년 10월 10일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위원장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사장을 지낸 함화진, 부위원장은 국악이론가 박헌봉, 총무국 유기룡, 문화국장은 아악수장을 지낸 장인식 등이었다. 당시 구성원의 주축은 창악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악연주자들과 아악계의 원로와 중진들이 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단체 내에는 아악부·정악부·기악부·창악부·무용부가 있었고, 사업국내에 국악학교기성회·국립극장설치위원회·국악기관지 발간 준비위원회·문헌악기 수집위원회를 두어 국악의 연구와 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직속 창극단체로 국극사를 두었다.

결성 초기의 공연활동은 판소리 공연과 창극단체 활동이 많았다. 국악원창설기념 제1회 발표회의「대춘향전」은 아악·창악·민요·무용을 종합구성하고 전국의 음악인 130여명이 출연하는 등 기존의 창극에서 볼 수 없었던 공연이었다.

국악원이 이름을 널리 알린 사업은 ‘전국농악경연대회’·‘전국향토민요대회’·‘민속무용발표대회’ 등이었다. 1946·1947·1949년에 각각 세 차례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는 일제강점기 동안 위축되었던 미풍양속을 활성화 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국악·연극·미술·무용·체육·문학·음악(서양)·채보(採譜) 등 예술계 각 부문의 심사위원을 두어 국악계의 상태를 알리고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서 ‘농악채보에 관한 좌담회(1946년 5월 20일)’ 활동과 구황궁아악부와 고전악기연구 등을 진행하였다.

1947년 8월 민족좌파를 비합법화하여 좌익계인사가 대량으로 검거되면서 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위원장 함화진이 피검되었고 간부들이 바뀌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0년 1월 구황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자 국악원도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전쟁이후 1957년 2월 20∼26일「향토민요대전(鄕土民謠大典)」을 시립극장에서 열었는데 민요의 중요성을 밝히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한 공연이었다.

대한국악원은 국악 강습회를 개최하며 국악발전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방이후 궁중음악과 민속음악계의 음악인들이 하나의 단체에서 활동한 최초의 단체이며, 농악·민요·무용 등 그동안 대중공연에 소외되었던 민속음악이 예술의 한 부문으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참고문헌

「해방공간전통음악계의 흐름」(이수정,『민족음악의 이해』4, 1995)
「해방과 분리공간의 음악사연구2」(노동은,『낭만음악』1권2호, 1989)
『동아일보』 (1957.2.20.)
집필자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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