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5년 10월 서울에서 결성된 국악연구 및 연주단체.
개설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단체 내에는 아악부·정악부·기악부·창악부·무용부가 있었고, 사업국내에 국악학교기성회·국립극장설치위원회·국악기관지 발간 준비위원회·문헌악기 수집위원회를 두어 국악의 연구와 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직속 창극단체로 국극사를 두었다.
결성 초기의 공연활동은 판소리 공연과 창극단체 활동이 많았다. 국악원창설기념 제1회 발표회의「대춘향전」은 아악·창악·민요·무용을 종합구성하고 전국의 음악인 130여명이 출연하는 등 기존의 창극에서 볼 수 없었던 공연이었다.
국악원이 이름을 널리 알린 사업은 ‘전국농악경연대회’·‘전국향토민요대회’·‘민속무용발표대회’ 등이었다. 1946·1947·1949년에 각각 세 차례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는 일제강점기 동안 위축되었던 미풍양속을 활성화 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국악·연극·미술·무용·체육·문학·음악(서양)·채보(採譜) 등 예술계 각 부문의 심사위원을 두어 국악계의 상태를 알리고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서 ‘농악채보에 관한 좌담회(1946년 5월 20일)’ 활동과 구황궁아악부와 고전악기연구 등을 진행하였다.
1947년 8월 민족좌파를 비합법화하여 좌익계인사가 대량으로 검거되면서 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위원장 함화진이 피검되었고 간부들이 바뀌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0년 1월 구황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자 국악원도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전쟁이후 1957년 2월 20∼26일「향토민요대전(鄕土民謠大典)」을 시립극장에서 열었는데 민요의 중요성을 밝히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한 공연이었다.
대한국악원은 국악 강습회를 개최하며 국악발전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해방공간전통음악계의 흐름」(이수정,『민족음악의 이해』4, 1995)
- 「해방과 분리공간의 음악사연구2」(노동은,『낭만음악』1권2호, 1989)
- 『동아일보』 (195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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