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1926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 제3기생으로 입소하여 대금을 전공했다. 1931년 졸업한 이래 줄곧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분야에서 활동했다. 관악기 연주에 통달하여서 전공인 대금과 단소에 장기가 있었다. 이왕직아악부원들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단소 · 당적 · 대금 · 지(篪) 등으로 독주하거나 이중주, 합주, 성악곡 반주를 했다.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6세인 1926년 3월 서울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하였다. 유의석(劉儀錫, 1858∼?)에게 대금과 단소연주법을 전수받았으며, 개인적으로 단소 연주에 몰두하여 단소명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31년 아악부원양성소 졸업 이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근무하면서 1933년 아악수(雅樂手), 1938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다. 1946년 1월 31일 이왕직아악부가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라고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다시 국립국악원으로 출범한 이후에도 궁중음악과 무용 연주자로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서울 중앙방송국 전속 조선음악악단 연주원, 1950년 서울 수복 후 육군 군예대(軍藝隊) 3소대 국악조에 편성되어 상이군인위문공연 등을 하였다. 1950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 장악과장, 1955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國樂師養成所) 전임강사를 지냈다.
국립국악원을 떠난 이후 1976년부터 정농악회(正農樂會)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정농악회는 서울대학교 교수 김정자의 발의로 이왕직아악부 출신 김천흥(해금), 이석재(장고) · 김성진(대금) · 김태섭(장고) 등 원로 연주가들과 김정자(가야금) · 서한범(피리), 양연섭(양금) 등 젊은 음악인들이 함께 정악(正樂)보존을 위한 활동을 한 단체이다. 첫 발표회는 1977년 5월 24일 국립극장에서 ‘정악연주의 밤’을 열어 영산회상을 연주하였고 매년 정기연주회를 해오고 있다. 봉해룡은 정기연주회에 참여하고, 1982년 LP음반으로 영산회상을 출반할 때 단소연주자로 참여하였다.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의 단소부문 예능보유자,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봉해룡의 단소선율은 매우 기교적인데 기존의 선율에 가락을 많이 덧붙여서 화려하고 복잡하여 연주하기 어렵다. 그의 단소가락은 현재 전승하고 있는 사람이 없으며, 남아있는 음악적 기록이나 음원도 매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