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악협회 ()

국악
단체
1932년 결성된 조선음악과 서양음악 연구 및 연주 단체.
정의
1932년 결성된 조선음악과 서양음악 연구 및 연주 단체.
설립목적

조선음악과 서양음악을 조화시켜 쇠퇴하는 조선전통음악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학구적 근거에 의해 조선 민족성에 적절한 정서와 음악현실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음악비평가 최동석(崔東石)·김영팔(金永八)이 1932년 4월 사직동 318번지에 사무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동서음악의 조화를 표방했기 때문에 단체 내에는 정악부(正樂部)와 합동악단인 요곡부(謠曲部)가 있었고 공연활동은 ‘동서음악대회(東西音樂大會)’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단체 결성 초기에는 음악인과 가수를 배출하여 레코드와 라디오에 내보낼 계획을 세우고 경성에 있는 음악단체에서 음악인들을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33년 8월 이후부터 활동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면 이즈음 단체가 해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짧은 활동기간이었지만 자선공연과 단체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서음악대회를 열었다.

1932년 9월 수원 종로유치원을 위한 자선공연은 정악부원들이 총출연하고 일류명창 명기들이 출연하였다. 1933년 8월 조선음악학원 기성회를 위한 동서음악대회는 경성 시내 장곡천정공회당에서 열렸다. 대동음악협회(大東音樂協會) 회원, 녹성동요연구회(綠星童謠硏究會)의 소녀합창, 각 학교 음악부원, 콜럼비아와 빅타 레코드 전속가수가 출연하였다. 전통음악 부분에는 조선악협회 소속 정악부원과 합동악단인 요곡부원이 출연하다. 이언식(현금)·이명호(가야금)·이성환(양금)·박일몽(생황)·최수성(단소)·명호진(당적)·김명수(피리)·지용구(해금)·이한경(장고) 등이 정악부의 악사로 출연하였고, 가수로 이동백, 병창에 오태석, 산조에 강태홍이 출연하였다.

기능과 역할

1920년대부터 꾸준히 동서음악대회가 개최되고 있었는데 이 공연들은 주로 청년회·의용단 등 각종 단체에서 운영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기획된 공연들이었다. 음악단체에서 동서음악의 조화를 표방하며 동서음악대회를 개최한 것은 조선악협회가 처음이다.

의의와 평가

단체의 존속기간이 짧아 활동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지만 합동악단인 요곡부를 두었고 연주회에서 서양음악, 동요, 대중음악, 전통음악 등을 수용하려 했다. 특히 단체 내 정악부에 생황이나 양금까지 편성된 갖춰진 풍류악대를 두어 정악계통 음악가들의 활동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32.4.12:1933.8.8)
『중앙일보』(1932.4.14:1933.1.18)
『매일신보』(1932.8.10:1933.8.10)
『조선일보』(1933.8.10:1933.8.12)
집필자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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