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전국에서 활동하던 판소리명창 50여 명이 조선고유의 음률을 살리고 사회에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음악가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결성하였다. 1933년경까지 정기공연을 비롯한 각종 음악회와 명창대회를 개최했다.
쇠퇴하여 가는 조선 고유의 음률과 음악가들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립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가곡(歌曲)의 수정과 보완, 새로운 곡의 발표, 음악회 개최, 음악회와 가풍(歌風)의 개선 및 정화, 동서음악의 비교연구, 조선음악에 관한 잡지발간 등을 목적으로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판소리 명창 50여 명과 단체결성을 지지하는 2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1930년 9월 25일 창립식을 열고 회장 김창환(金昌煥), 부회장 김창룡(金昌龍)·송만갑(宋萬甲), 총무 한성준(韓成俊)·강원삼(姜元三), 통리부(統理部) 이기세(李基世)·이원배(李元培) 등을 선출하였다. 서울 종로2정목(현 종로2가) 조선축음기상회 안에 사무소가 있었다.
같은 해 11월 19일∼20일 조선극장에서 제1회 정기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에 ‘조선가곡정화공연회’라는 부제를 붙여 협회 창설정신을 잘 드러내고자 하였다. 참신한 무대를 위해서 무대장치 전문가를 붙인 공연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경성방송국에서 이틀간의 공연을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비속해진 악도(樂道)를 음악 본래의 숭고한 지경으로 정화시키려 노력하겠다는 조선음률협회의 의도에 대해 1930년11월 21일『매일신보』에서 ‘조선악 개시 이래 처음 보는 훌륭한 음악회를 선보였으며, 구태의연한 음악과 태도를 버린 전혀 새로운 기분이 드는 진중한 태도의 연주였다’고 평가하였다.
1931년 3월 30일∼31일 제2회 정기공연과 1932년 6월 22일 제3회 정기공연에도 조선음악의 정화를 위한다고 하는 공연의 방향성이 드러나 있다.
이외에 기획공연으로 1931년 9월 29일 세명의 여성명창을 위한 삼여류명창공연음악회, 1932년 7월 8일∼10일 전조선명창대회, 1933년 2월 14일∼16일 일류명창대회를 개최했다. 경성의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열린 삼여류명창공연음악회는 박녹주·김초향·박월정이 단가와 판소리·서도소리를 한 대목씩 부르는 방식으로 기획된 ‘조선최초의 시험’이라 불렸던 파격적인 공연이었다. 공연 당일에는 비행기로 수 만장의 전단지를 뿌려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고 예매 전화도 폭주했다. 성공적이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연주에서 효과가 좋지 못했던 부분은 음악 환경이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두 번째 삼여류명창공연음악회는 김초향 대신 박정옥이 출연했다. 두 번의 명창대회는 인천과 대전 등 지방에서 개최되었는데 명창들이 대거 출연하는 공연이었다.
1933년 2월에 열린 일류명창대회를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 기록이 보이지 않아서 이후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음률협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1934년 4월경 조선성악원(이후에 조선성악연구회로 명칭 변경)으로 옮겨가 활동을 계속하였다.
판소리연주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최초의 단체이며, 사업을 통해 추구하려던 방향이 이후 후속단체들의 설립목적과 취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활동 기간이 길지 않아 계획한 내용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새로운 시도를 했던 음악회와 음악 정화 노력 등에 성과가 있었다. 이후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