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仁寺洞)에 사무실이 있었고, 단체의 설립과 해산 경위는 알 수 없다. 1928년 7월 27일∼29일까지 경운동(慶雲洞) 천도교기념관에서 명창대회를 개최했다.
1920년대 경성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음악인들과 신분이 해방 된 기생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는 개인이 음악 활동을 하는 것에 제약과 한계가 있어서 극장 또는 권번에 전속으로 소속되거나 단체를 조직하였다. 활동을 위해 광월단(光月團)·조선악연구회(朝鮮樂硏究會)·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조선악연구협회(朝鮮樂硏究協會)·가무연구회(歌舞硏究會)·호남악우회 등이 결성되었다. 이중 일부 단체는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집단의 성격을 띠어 몇 차례 공연을 한 후 해산되어 이름만 전해진다. 호남악우회도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결성된 단체 중 하나로 파악된다.
호남악우회는 1928년 7월 27일∼29일까지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납량(納凉)명창대회를 개최했다. 납량구악(舊樂)대회라고도 한다. 공연종목은 가곡(歌曲)·춘향가·적벽가·심청가·남도잡가·가야금 등이었다. 유성준(劉聖俊)·오태석(吳太石)· 김추월(金秋月)·이화중선(李花中仙) 외 여러 명이 참여했다. 호남악우회라는 이름하에 영호남의 명창들이 함께 공연하였다.
김추월과 이화중선은 일찍부터 경성에서 활동하며 경성방송국에서 방송활동과 음반취입 등으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경성방면에는 아직 이름이 없는 유성준 군의 판소리는 특별히 여러 관객의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55세인 유성준이 호남악우회를 통해 경성무대에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결성 이후 한 번의 공연 이외에 활동이 없었지만, 남도 지역 음악인의 재경 활동 기반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