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마탄사스지방회(Matanzas地方會)는 처음에 한인 감리교회의 예배당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을 새로 짓고서본부 건물이자 민성국어학교(民成國語學校)의 교사로 활용하였다.
1921년 3월 25일에 멕시코를 떠난 한인들은 쿠바의 마나티(Manati)항에 도착한 뒤, 마탄사스 지역의 핀카 엘 볼로(Finca El Bolo)로 이동하여 정착하면서 한인 마을을 이루었다. 당시 일본 영사관은 한인을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간섭하려고 하였다. 이에 6월 14일에 한인들은 자치 기관이자 독립운동 기관으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설립하였고, 11월 1일에 마탄사스 지방 관청에 의해 정식 단체로 허가를 받아 한인들을 대변하는 공식기관이 되었다. 그 뒤 마나티지방회와 카르데나스(Cardenas)지방회가 설립되자, 쿠바지방회는 편의상 마탄사스지방회로 불렸다.
마탄사스지방회는 처음에 한인 마을 안에 자리한 감리교회 예배당을 국민회관으로 함께 사용하였는데, 건물이 작아서 불편이 적지 않았다. 1922년에 마탄사스 지역은이곳에 거주하던 한인 가운데 약 3/4의한인이 카르데나스 지역으로 옮긴데다가, 지역의 농업경제도 위축되었다. 한인들은 농장 노동이 제한되었고, 임금마저 최저 상태에 빠지는 절박한 상태를 맞았다. 이러한 사정은 미주의 한인 사회에도 알려져,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서는 구제금 310원을 거두어 보내주기도 하였다. 마탄사스지방회는 어려운 경제적 사정에도 불구하고 구제금을 공익기금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8월에 구제금 310원 가운데 250원으로 나무로 지은 가옥을 구입하고서는 교회 겸 회관으로 사용하다가 그 뒤에 설립한 민성국어학교의 교사로도 이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제 가옥은 면적이 좁은데다가 비까지 새어 불편하였다. 마탄사스지방회의 집행부는 회관 건물의 신축을 의결하고 박창운, 김치일, 서병학 등을 건축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이들은 신축 비용으로 2,500원을 예상하고 부족한 금액은 1인당 10원씩 모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1924년 9월에핀카 엘 볼로의 한인 마을에 국민회관을 새로 지었다.
마탄사스 국민회관은대한인국민회 활동의 거점이면서 한인 교회로도 이용되었고, 민성국어학교의 교육장으로도 활용되었으며, 청년학원의 교육시설로도 사용되었다. 그 뒤 대한인국민회 회원들이 핀카 엘 볼로의 한인 마을을 떠나고 핀카 엘 볼로의 땅마저 팔리면서, 이 건물은 더 이상 국민회관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1943년~1951년에 마탄사스 지역의 한인들은 이 지역의 한인 지도자인 임천택(林千澤, 1903~1985)의 집을 마을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쿠바 마탄사스 지역 한인 사회의 중심으로, 한인의 자치 활동과 교육 활동, 독립운동 등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다.